Sylphid 4th - 2. Indaco e Sangue : 6


  밤을 지나 새벽 시간 대에 이르렀지만 라니아의 집에는 여느 때보다 많은 이들이 모여있는 것처럼 보였다. 집 안쪽의 거실에 위치한 소파들 중에서 안쪽의 창가에 라니아가 앉아 있고, 그 우측에 보였던 소파에 클라리스와 미라가 앉아 있었으며, 소파 위로 린나와 모니카, 리피, 피, 피다 그리고 어느새 집으로 들어온 리지(Rijy) 까지 붙어 있거나 소파 위에 앉아 있어서 그 일대 만큼은 소녀들로 그야말로 북적이는 광경을 보이고 있었다. 반면에 왼편의 소파에는 키아라와 미냐만 앉아 있을 따름이었다.
  "어서 와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여러분~ 리에타도 와서 앉으렴~."
  "뭘 앉아 있어, 늦었는데. 아, 맞다, 키아라하고 미냐도 일어나, 손님들 앉으셔야지!"
  그러자 미라가 핀잔을 주는 듯이 늦게 온 리에타에게 앉지 말라고 청했고, 더 나아가 키아라, 미냐에게도 일어나라고 하자, 바로 키아라가 항의 개시, 미라가 아닌 클라리스를 향해 일어나야 할 사람은 그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자마자 나는 라니아에게 자신은 일어나 있어도 좋다고 말하고서 적당한 곳에 머무르며 대화에 참여하겠음을 말했다.
  "그래도 손님이신데." 이에 클라리스가 손님이지 않냐고 말하자, 나는 상관 없다고 말했고, 그 이후로 나는 아네샤와 함께 키아라, 미냐가 앉은 소파 부근의 바닥에 약간 떠 있으면서 클라리스 등이 앉은 소파, 그리고 라니아가 앉은 소파를 바라보면서 라니아 등의 대화에 참여하려 하였다. - 소파는 3 사람이 나란히 앉을 수 있었기에 공중에 머무르고 있던 나와 아네샤를 대신해 리에타가 미냐의 바로 옆에 앉을 수 있었다.



  "거기서 무엇을 보았었니?"
  '그 곳' 이라면 해군 기지의 유적 너머, 암운에 의해 그 모습이 가려진 섬이었을 것이다. 라니아가 건네는 물음에 클라리스가 즉답하였다, 페허로 가득한 섬에 거미 괴물 같은 기계 병기들과 죽은 이들의 유해, 그리고 악의 마법진과 섬에서 목격했던 검은 갑옷의 기사가 기계 병기들과 같이 있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고 하였다. 악의 마법진 한 가운데에는 제단이 있어서 그 제단을 통해 검은 갑옷의 기사와 기계 병기들이 사람들을 죽이고, 이어서 희생자들의 살과 피 그리고 뼈를 취했을 것으로 여기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해군 기지의 유적 그리고 섬의 곳곳에 빛 방울들이 있어서 그 빛 방울들을 통해 그 곳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지냈는지, 그리고 희생되었는지를 대략이나마 짐작해 볼 수 있었어요."
  "빛 방울들이 기억한 목소리들을 들어서 알았구나."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키아라가 자신과 마주하고 있던 클라리스를 보면서 말했다. 그 무렵, 라니아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식탁 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 곳에 있던 이들에게 무언가를 만들어주려 하였던 모양.
  "빛 방울의 목소리를 통해 어떻게 사람들이 전이해 오고 그로 인해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 수 있었어?"
  "어떤 말을 했느냐에 따라 달라,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러하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았어."
  이후, 미냐가 빛 방울이 기억하고 있었던 목소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얼마나 알아들을 수 있었느냐에 관해 건네는 물음에 클라리스가 차분히 목소리를 내어 답했다. 다만, 목소리의 억양이라든가 어조를 통해 그 화자들이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는 대략이나마 짐작해 볼 수 있었다고 말한 이후에 빛 방울이 기억하고 있던 목소리들은 모두 공포에 떨고 있는 목소리였음을 밝혔다.
  "그들이 모두 세상에 소환되면서 공포에 떨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 거야."
  그러한 미냐의 말을 듣자마자 클라리스, 미라는 모두 동의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뒤에 있던 어린 고양이 소녀들과 요정들 역시 그의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 이후, 린나가 처음부터 모든 이들이 공포에 떨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라 말하였고, 이어서 리피와 리지가 막상 위험한 상황과 마주할 수밖에 없게 되니, 그로 인한 두려움이 이성을 압도해 버렸을 것이라 당시 희생되었을 이들의 심정에 대한 나름의 추측들을 밝히고 있었다.
  "그런데, 기계들이 생명체의 살과 뼈 그리고 피를 취한다고 했는데, 기계들이 그것들을 어떻게 활용한다는 거예요? 기계들은 원칙적으로 그런 것들을 먹거나 할 수 없잖아요."
  이후, 이번에는 리지가 어떻게 기계 병기들이 생명체의 살과 피를 먹을 수 있는지에 대해 물으려 하였고, 이 물음에 키아라가 바로 답했다. 살과 피를 취해서 그것을 플라즈마화해 동력원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으로 상글랑트, 과부 거미의 심장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에도 언급된 바 있는 것이었다.
  "기계 병기들 중 대다수는 토카막(Tokamak) 이라 칭해지는 동력 장치가 장착되어 있어. 물질을 플라즈마화해서 연료로 삼는 원리를 갖는다고 알려져 있지, 어떤 물질이든 플라즈마화만 시키면 동력원으로 삼을 수 있기에 일반적으로는 이러한 장치의 동력원으로서 바닷물이 활용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
  이어서 키아라는 조금 더 심각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그 기계 병기들, 기계 생명체 집단은 생명체들, 특히 인류로 칭해지는 생물들이 가진 것들을 탐한다고 해. 그래서 수하 병기들을 시켜서 그 생물들을 살육하고 그 살과 피, 그리고 뼈를 수거해서 자신의 몸체 내부 안에 쌓아두고 플라즈마화를 시킨다고 하였어.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짓을 한다는 거야."
  "....... 물을 이용해도 될 것을 그렇게 하는 것은 인류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있기 때문이 있기 때문인 것일까요?"
  이후, 리지가 건네는 물음에 키아라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답하고서, 그 기계 병기들은 인류와 더불어 모든 생명체들은 우주에서는 없어져 마땅한 족속으로 여기고 있으며, 그와 더불어 인류, 더 나아가 생명체들은 그들에게 있어서 그저 자신들의 동력원에 지나지 않을 뿐임을 보여주는 현상이기도 하다고 말을 이어가기도 했다.
  "클라리스, 리피, 혹시 그 검은 기사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알아냈어? 어떤 사람이었는데?"
  그 이후, 미냐가 클라리스, 리피에게 시선을 향하면서 물었고, 그 물음에 리피는 빛 방울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서 '귀네베흐(Güenebere) 라는 이름이 들려왔고, 이를 통해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아흐튀흐 왕의 측근 기사들 중 한 명이었던 랑슬로(Lancelot) 로서, 아흐튀흐의 정실 부인이었던 귀네베흐와의 불륜을 자행했다가 그로 인해 모든 것을 잃고, 자신도 자신의 동료들을 수없이 죽이고 말았던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
  "이후에도 여러 빛 방울들의 목소리를 통해 랑슬로가 기계 병기들에 의해 되살아나 그들에 의해 회유되고 말았음을 알 수 있었어요, 사람들을 죽이고 그 혼들로 귀네베흐를 되살릴 수 있다고 믿으며, 무고한 사람들을 외부 세계에서 끌어와 살육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 귀네베흐라는...... 여자였겠지? 그 여자를 되살리기 위해 그런 짓을 벌였다고?"
  이후, 미냐가 경악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묻자, 리피가 그러하였다고 답했다.
  "실은, 이용당한 것이었지요. 그는 모든 것을 잃었고, 그로 인해 모든 희망을 잃은 상태였어요. 그런 상태로 망령화되어 가다가 기계 병기 군단에 의해 발견되어 귀네베흐의 몸을 확보하고 있다니 뭐니, 그런 이야기를 듣고 나니, 랑슬로는 그를 되살리기 위해서라도 기계 병기들의 뜻에 따르게 되었던 것이, 섬에서 일어났던 모든 학살극의 시작점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처음에는 타의에 의해 자행했지만, 점차 그것이 자의로 변해갔다, 그렇게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지, 사람이란 본래 그렇게 타락하게 되어있는 거야."
  이후, 키아라가 건네는 물음에 미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답했다. 이미 주군의 애정은 물론, 카믈로의 기사로서의 위상을 잃은 것은 물론, 그로 인해 기사도의 모든 것까지 잃어버렸던 사람으로서, 기본적인 기사도 정신마저 없는 포악한 전사로서의 타락은 이미 예견된 것이나 다를 바 없었음을 이어 밝히기도.
  "하지만 기계 병기들은 귀네베흐를 그에게 허락하지는 않았겠지?"
  "그렇지, 기계 군단이 확보했다는 육신은 진짜 육신이 아니었고, 그의 마음을 조종하기 위한 일종의 '미끼' 에 지나지 않았어. 랑슬로가 클라리스와의 대결에서 패배했을 무렵에 그는 이용 가치를 잃었고, 그 시점에서 귀네베흐의 형상은 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어. 아름다웠던 여인의 모습이 해골의 모습으로 변해 가면서 랑슬로의 육신을 파괴했고, 그 이후, 그 해골은 플라즈마 덩어리가 되어 섬의 지하에 잠든 군단의 수괴라 할 수 있는 거대 병기에 흡수되고 말았던 거야."
  "랑슬로는 그야말로 이용만 당하다가 죽은 것이었네, 그렇지?"
  그리고 키아라, 미냐가 건네는 물음에 클라리스가 미라를 대신해 그렇다고 답했다. 미라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써 답하고 있었다. 이후, 키아라가 그 생명체의 정체는 섬에 숨겨져 있던 기계 병기의 인격이라든가, 그런 것 아니었느냐고 물었고, 이 물음에 클라리스가 답했다.
  "그렇지 않아, 그의 진짜 인격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이후, 랑슬로의 곁에 나타났던 그 젊은 남자였어. 여자는 병기가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했었지. 그 남자가 랑슬로가 죽은 이후에 본색을 드러냈고, 그 이후, 악의 마법진이 있던 지면이 들어올려지면서 그 남자의 본 모습이 드러난 거야."
  클라리스는 그 병기의 이름이 '뵈브 상글랑트(Veuve Sanglante)' 로서, '피의 과부거미' 를 의미한다는 말을 하고서, 뵈브 상글랑트를 비롯한 기계 병기들이 랑슬로를 이용해서 무고한 사람들을 마구 죽이는 만행을 자행했으며, 자신의 의지에 상관 없이, 그 만행을 저질러야 했던 랑슬로 역시 그에 의한 피해자였음은 분명하다고 그에 대해 말하기도 했다.
  "뵈브 상글랑트의 음모였을 줄은 몰랐겠지만, 그 섬에는 랑슬로에 의해 희생된 것처럼 보였던 수많은 영혼들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었어. 그 모습도 보였지만,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메아리 (Ekho) 의 일종이었던 것 같아."
  그 다음으로 미라가 랑슬로 그리고 과부거미에 의해 희생당한 영혼들의 형상을 보았었다고 말하고서, 그들이 자신을 비롯한 일행에게 과부거미의 '심장' 을 파괴해 자신들을 구해 달라고 당부를 하기도 했었다고 이전의 일에 대해 소개를 이어 가, 그 '심장' 의 파괴는 클라리스가 그가 들고 있던 검으로 해낸 것으로 마쳤다.
  "그러고 보니, 클라리스, 지금껏 들고 다니던 검이 보이지 않는데, 혹시 그 심장을 파괴하다가 검이 부서지기라도......."
  "...... 그렇게 됐어." 이후, 미냐가 놀라면서 클라리스에게 묻자, 클라리스가 조용히 그렇게 됐다고 답했다. 이후, 키아라가 클라리스를 잠시 동안 가만히 살펴보더니, 정말로 검이 없다고 말하고서,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클라리스의 모습을 보면서 물었다.
  "이전에 영혼의 형상들을 만났다고 했었지? 그렇다면 그 곳에 있던 영혼들은 원래 어디에 있었대?"
  "응, 그 뵈브 상글랑트의 '심장' 에 영혼들이 있었대, 그 때에는 그 장치가 비활성 상태라 잠시나마 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 거야. 장치가 활성화되면 그 장치 안으로 끌려 들어가게 되고, 거기서 물질화된 영혼들이 그들이 흘린 피 그리고 살과 함께 플라즈마화하여 동력이 되어가는 것이지."
  "그 심장이라는 것이 토카막이라고 했었나? 영혼이 물질화에 플라즈마화까지, 그것도 토카막에서 그렇게 되었다면 설마.......!"
  키아라의 물음에 미라가 답을 하자마자 키아라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버리기 시작했고, 더 나아가 미냐 역시 표정이 굳고 있었다. 건너편에 있는 클라리스, 미라, 리에타 그리고 리피, 리지 등 역시 그 표정의 의미를 알고 있었던 모양으로 미라, 리에타는 다소 걱정이 되는 듯한 표정을, 클라리스는 안타까움이 주가 되는 복잡한 표정을, 그들 뒤에 있던 리피, 리지, 엘피, 피다는 슬퍼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 물질화가 되었다는 것은, 그런 거야, 원자(Atom) 들의 집합이 된다는 것 아니겠니? 그러니까......"
  클라리스가 말을 잇지 못하자, 미라가 대신 말을 이으려 하였지만 그 역시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내가 그 표정을 보았는데, 기막힘에 어이 없음, 여기에 분노까지 가해진 표정이었다.

  "얘들아, 다들 고생 많았어, 기념해서 만들어 왔단다, 어서들 먹어~. 손님 두 분도 이리 오셔서 드세요~."
  그 무렵, 그간 자리를 비우고 있던 라니아가 두 손에 쟁반을 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쟁반 위에는 그간 그가 준비했을 많은 음식들이 놓여 있었으니, 각종 샐러드 류를 시작으로 계란 말이(Omîlet), 샌드위치(Saendvic) 류, 그리고 평소에는 자주 보지 못하는 마키(Maki), 물고기 류를 이용한 스시(Sîshi) 등-훈제 생선을 이용했다고 한다-의 다양한 음식들을 선보이고 있었다. 라니아는 쟁반을 들고 소파들 그리고 한 가운데에 있는 탁상 근처에 이르고서는 탁상 위에 쟁반을 올려놓고서, 건너편의 소파에 앉았고, 이 무렵에 나와 아네샤 역시 소파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앉을 곳은 없었지만, 구름을 이용해서 앉을 자리를 어떻게든 마련하려 하였다.
  개인에게 주어진 쟁반에 놓인 음식으로는 계란 말이 3 개, 샌드위치 2 개, 마키 10 조각, 그리고 스시 10 개로, 스시의 재료는 쌀과 훈제된 연어(Salmona) 살이었다고 한다. 이런 쟁반을 라니아는 나와 아네샤를 위한 것을 시작으로 클라리스, 미라, 리에타, 미냐, 키아라의 순으로 쟁반을 제공해 주었고, 그 이후로 리피, 리지, 엘피, 피다를 위한 작은 접시들을 제공해 주었다. 제공된 음식의 종류는 다른 이들과 다르지 않았지만 어린 요정들이었던 관계로 그 수량이 다른 이들에 비해 적기는 했다. 그간 라니아가 주방에 있으면서 조리를 하는 데에 꽤 많은 시간이 소요된 듯해 보였는데, 그 많은 것들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그 만한 시간이 필요했을 것임은 틀림 없어 보였다.
  "오늘은 평소보다 많이 준비했어, 클라리스도 그렇고, 미라도 그렇고, 다들 고생 많이한 것 같아서 말야."
  "아줌마~ 잘 먹겠습니다옹~ 오늘 오기를 참 잘 한 것 같다옹~." 식탁 위에 음식이 놓이자마자 리에타는 기다렸다는 듯이 스시부터 먹기 시작했다. 스시 자체가 맛있었다기보다는 생선을 먹고 싶어했던 모양.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와 아네샤도 포크와 나이프를 하나씩 들고서 샐러드부터 먹기 시작했다. 집에서 키우는 듯한 채소 위에 구워진 생선 살을 곁들인 샐러드는 드레싱도 괜찮게 만들어진 것 같아 나름 맛이 좋았다. 드레싱은 그간 자신이 채즙해서 갖고 있던 과일즙을 이용해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나름 맛이 괜찮아서 샐러드를 먹는 데에 여러모로 도움이 됐다.

  "처음 쟁반을 가져올 무렵에 심각하게 무언가에 관해 이야기를 주고 받는 듯해 보였어, 무엇에 관한 이야기였니?"
  한참 동안 이어진 식사가 대충 마무리 되고, 거실에 있던 이들이 하나씩 쟁반을 주방의 싱크대 쪽으로 가져간 이후, 탁상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을 무렵, 라니아가 대화를 하다 말고 식사에 집중하던 소녀들을 한 번씩 둘러보면서 질문을 했고, 잠시 후, 그 질문에 클라리스가 라니아의 모습을 보며 답했다.
  "다소 심각한 이야기가 이어지고 있었어요."
  그리고서 이전에 자신이 직접 처치한 병기의 '심장부' 에 관한 이야기로서, 그 '심장부' 가 어떻게 동력을 확보하고 운용해 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다가 그로 인해 친구들이 충격을 받은 것 같다고 이전까지 자신에게 있었던 일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가려 하였다.
  "그 기계 병기가 사용하려 하였던 동력원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데, 그 동력원이라는 것이......."
  하지만 클라리스 역시 더 말을 잇지 못했고, 그래서 라니아에게 자신은 그 정도로는 놀라지 않는다고 말하고서 얼마든지 말해 보라고 그에게 다시 부탁을 하였고, 그제서야 클라리스는 심각하게 이야기가 이어지던 이유를 클라리스에게 말해주려 하였다 :
  "기계 병기의 '심장' 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그 '심장' 에는 토카막이 있는데, 그 토카막에서 플라즈마화되고 있었을 동력원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다가 그만......."
  "....... 그랬구나."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생글생글 웃는 모습을 보이던 라니아의 표정이 그 이후로 바뀌었다. 그에게도 그 잔혹한 기계 병기의 심장인 토카막에 관한 이야기는 가볍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토카막에 관해서는 잔혹한 이야기들, 그리고 당혹스러운 이야기들이 오갈 수밖에 없음은 틀림 없지. 원래 토카막은 그렇게 구동하는 것이 아닌데, 그런 자들로 인해 토카막의 인식이 이상하게 변질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영혼의 물질화에 관해서는 이전 세계에서도 중점적으로 다루려 했던 사항인 것으로 알고 있어. 그것을 통해 태고의 인간들이 무엇을 추구하려 했는지에 대해서는 이제는 기록이란 것들이 거의 남지 않아 알 방법이 없기는 하지만 그들이 영혼을 물질화하는 것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여러 연구를 진행했음은 분명해.
  그 기계 병기들은 아마도 그들의 신적 존재라 칭해진 자로부터 지식을 받았을 거야. 이름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런 사람이 있었어. 인류가 아니라 기계가 세상을 지배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진 '인간' 이었지. 그런 '인간' 을 신으로 모시고 있었을 기계 병기들은 그로부터 받은 지식을 기반으로 기술을 개발했을 거야, 영혼의 물질화 기술도 그 중 하나였겠지.

  "그들이 어떻게 그런 기술을 구현했는지, 그 과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지요?"
  "그렇지, 어디까지나 그들의 영역에서 개발된 기술일 테고, 수많은 성계들에게 있어서 적성 세력인 그들의 기술은 금단의 기술로 치부되고 있을 테니, 그들의 기술이 어떻게 개발된 과정에 관해 알기는 쉽지 않을 거야."
  키아라가 라니아에게 건네는 물음에 차분히 목소리를 내면서 답했다. 그리고,
  "그 기계 병기의 토카막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모두 짐작해 본 바 있을 거야."

  라니아가 이후, 언급한 토카막에서 기계 병기들이 행하는 일이란 이러하였다 : 영혼이 물질화되면 수많은 원자들로 구성된 기체 물질처럼 변하지. 병기들은 그 물질화된 영혼과 더불어 희생자들의 피를 비롯한 체액에서 뽑아낸 수분까지 모두 플라즈마화시킨다고 하였다. 이후, 구성하는 원자들까지 모두 합쳐 그들을 구성하는 원자들을 융합해서 그 열기를 에너지로 변환한다는 것이었다.

  "그 열기가 어떻게 에너지가 되는지는 일반적인 토카막 발전과 크게 다르지는 않아."

  그렇게 물질화한 영혼들의 원자들이 분열하고 융합하는 과정에서..... 모두 알고 있을 거야, 영혼들은 인간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크나큰 고열 그리고 변질에 의한 크나큰 고통을 받게 되지. 그리고 변질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영혼들의 인격이 뒤틀리게 되고, 더 심해지면 인격이 소멸될 수도 있을 거야.

  "인격이 소멸되면 인간의 모습을 유지할 수 없는 것이겠죠?"
  변질된 영혼에게서 인격이 소멸될 가능성에 대해서는 모두 당연하다고 여기면서도 있어서는 안 되는 공포스러운 일이라 여기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 와중에 미라가 조심스럽게 라니아에게 물었고, 그 물음에 라니아는 다소 심각해진 목소리로 그러할 수 있다고 화답했다.
  "인격이 뒤섞이고 변질되어서 아마도 원래는 어떤 사람이었을지는 이제 영혼들을 통해서는 알 수 없게 되었겠지, 인간의 모습 자체를 잃어버린 이들도 아마 있을 거야."
  "그렇다면 그 폐허에서 저희들이 발견했던 그 영혼들의 형상은 어쩌면......"
  "그것은 영혼들이 남긴 사념체의 일종이었을 거야. 영혼들을 대신해 그것들이 그 곳에 남아 너희들에게 원한을 풀어달라는 목소리를 내었으리라는 것이지. 그 때, 너희들 앞에서 그 형상들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자신들의 상황을 말하려 했겠지만, 그것은 아마도 오래 전 그들의 사념들이 너희들에게 닿았을 것이라 볼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도리에 의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일이었으니, 그 일이 헛된 것은 결코 아니라고 이어 말하고서는 그 해방된 영혼들은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육신을 만나 새로운 인격과 모습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이를 위해 클라리스가 나선 듯해 보이더구나. 그래, 잘 했다. 귀한 검이 부서지기는 했지만, 무릇 검과 창을 비롯한 무기들이란 것은 언젠가는 부서지게 마련,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한다는 큰 사명을 이루는 데에 어떤 검도 그만큼 값지지는 않을 거야. 이번 일은 검의 바탕이었을 무기들을 갖고 있었을 아흐튀흐 역시 그 일을 두고 무척 기뻐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그렇다면 아흐튀흐 왕은 자신의 검들을 본래 어떻게 활용하려 했으려나요, 검이라는 것은 결국에는 누군가를 물리치기 위해 있는 것일 텐데......."
  이후, 키아라가 라니아에게 다시 물음을 건네자, 라니아는 "잘 모르겠구나." 라는 한 마디 말만 건넬 뿐으로 더 이상의 말을 건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서 뭔가 그가 이루려 하기는 했겠지만 클라리스가 검을 희생하면서 행하려 했던 일만큼 값진 일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는 일이라 말했다, 아흐튀흐 왕이 검을 가지고 전쟁과 정복 이외의 어떠한 큰 사명을 이루려 했는지 자체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리에타, 그렇다면 네가 클라리스에게 검을 새로 만들어 주는 거니?"
  "예, 그렇기 하기로 했어요. 그렇지 않아도 그간 그 검은 미라의 검이나 아니면 결정을 이용해서 만들어내는 여타 도검 류와 다르게 마력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아무래도 한계가 있기도 해서 클라리스가 가진 마력을 적극 활용하는 데에 클라리스가 소극적이 되도록 하는 면이 있어서 클라리스가 검격을 행하면서도 자신의 마력을 적극 활용할 수 있도록 검을 새로 만들 필요가 있기는 했었어요. 그래서 클라리스가 자신의 검에 나름 애정이 있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검을 만들려 했었는데....."
  클라리스가 온전히 검을 소지하고 있었을 때에 리에타는 어떻게 검을 만들지에 대해서는 구상만 대략 해 놓은 상태였다고 한다, 당장에 만들 필요가 없어서 그랬다고 했지만 이제는 그간 구상한 대로 검을 만들어야 하겠다면서 멋쩍게 웃음을 지었다. 검의 모양은 가능한 클라리스가 이전에 사용했던 것과 똑같은 형태로 만들려 한다고 말했고, 그래서 클라리스가 리에타를 향해 잠시 고개를 돌리며 이렇게 묻기도 했다.
  "그 말, 믿어도 괜찮은 것이지?"
  "물론! 그간 나를 오랫동안 지켜봐 와 잖아, 믿어 보라고!"

  한편, 나는 이미 식사를 마친 후에 빈 쟁반을 두 손으로 들고서 내가 앉은 자리에 있던 구름을 치우고 바닥에 착지했으며, 아네샤 역시 같은 방법으로 바닥에 착지하고서 먼저 빈 쟁반을 들고 부엌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하니, 그 모습을 보면서 라니아가 말했다.
  "빈 접시는 식탁 위에 올려 놓으세요, 쟁반은 제가 알아서 씻어 놓도록 할게요."
  그러는 동안 다른 이들도 자신들에게 주어진 쟁반을 거의 비워놓은 상태였기에 린나와 모니카부터 리피, 엘피, 피다, 리지가 나와 아네샤를 따라 각자의 빈 쟁반을 식탁 위에 차곡차곡 쌓아 올렸고-아네샤가 빈 쟁반을 식탁 위에 올려놓자, 내가 그의 쟁반 위에 내 쟁반을 올려놓은 것이 시작이었다-, 그리하여 당시 부엌에 있던 이들의 큰 쟁반 6 개, 작은 쟁반 7 개가 쌓인 모습이 나란히 자리잡은 모습이 식탁 위로 보이게 되었다-작은 쟁반은 먼저 쟁반을 올려놓은 린나가 큰 쟁반 옆에 올려놓은 이후로 큰 쟁반들 옆에 쌓이기 시작했다-. 이후, 다시 어머니의 곁으로 돌아오려는 린나 그리고 린나를 따라가던 모니카에게 라니아가 물었다.
  "린나하고 모니카는...... 아아, 그러고 보니 이제는 자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기는 하구나."
  자신의 곁에 모인 이들 중에 아직 어린 린나 그리고 모니카도 같이 있는 모습을 보면서 라니아는 지금이라도 방에 가서 잤으면 좋겠다고 말하려 했지만 이미 너무 늦은 시간이라 자라고 말하기가 난감했던 모양이었다. 한참을 말을 잇지 못하던 라니아는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린나와 모니카를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 그 대신, 오늘 밤에는 일찍 자려무나, 알겠지?"
  그러자, 린나와 모니카 모두 "예~" 라고 답하는 목소리를 내었고, 이에 키아라가 라니아에게 그 당부대로 아이들이 일찍 자려 할 것인지에 대해 묻자, 라니아는 늘 자신의 말들을 잘 따라주던 아이들이었다고 말하고서, 반드시 그렇게 해 줄 것이라 미소를 띠며 이어 말하기도 했다.
  "다들 수고했어, 엄청난 일들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해서 걱정이 많았는데, 이제 그 걱정 거리를 놓아두고 편안히 있을 수 있겠구나."
  이후, 라니아는 식사를 마친 이들에게 그간 있었던 일들에 대해 모두 수고했다고 말하고서, 이제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집으로 가고 싶은 사람은 가라는 말에 라니아를 제외한 대부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 늦은 시간에 찾아와 주어서 고맙다고 라니아가 집에 모인 클라리스, 미라 등을 비롯한 마을의 소녀들에게 말을 전하고서 그들에게 이후에는 집 안 혹은 집 근처에서 조금 더 시간을 보내다가 각자 집으로 돌아가서 잘 것을 청했고, 그렇게 모임이 끝나면서 모여있던 이들은 각자 하고 싶은 일을 위해 거실을 나서서 집 안과 밖의 다른 곳으로 갔다. 라니아는 더 하고 싶은 이야기, 더 보여주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고 했지만 남은 것은 이후에 날이 밝았을 때, 집으로 찾아오면 더 해 주겠다고 말했다.



  라니아의 집에 린나, 모니카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 머무르고 있었을 클라리스, 미라는 키아라 그리고 미냐와 함께 집 밖으로 나가 있었고, 린나와 모니카는 리지, 엘피 등의 작은 요정들과 함께 안 방에서 놀고 있었다. 떠들썩한 소리가 방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지만 라니아는 크게 개의치 않았던 모양으로 나 역시 라니아가 다소 우려되기는 했지만 그 점을 제외하면 뭐라 문제 삼을 것은 없다고 여기었다. 나와 아네샤 역시 어렸을 적에는 그처럼 친구들과 더불어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놀았던 적이 있었으니.
  라니아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서 키아라, 미냐가 앉았던 자리에 앉았고, 이에 나와 아네샤는 그 건너편의 여러 아이들이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최대한 예의 바르게 앉으려 하는 나와 아네샤의 모습을 보면서 라니아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지만 그러한 일행의 모습에 대해서는 뭐라 말하지 않고, 바로 하나의 화제에 관한 이야기를 하나의 물음을 건네는 것으로써 이어가기 시작하였다.
  "키아라 등이 집으로 오면서 말을 전해 주었지요, 세니티아 행성계의 옛 인류, 그 행방을 찾고 싶으신 것이지요?"
  "예, 그것이 목적이 되어서 지금 이렇게 세니티아 행성계를 떠나 여기로 오게 된 거예요."
  "그렇군요." 이에 라니아는 조용히 목소리를 내면서 화답했다. 그리고 잠시 동안 고개를 약간 숙이고서 생각에 잠긴 듯이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다가 다시 고개를 들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그 목소리를 듣기 시작하자마자 그의 모습에 시선을 집중시키려 했다.
  "세니티아 행성계 아니 성계권에 인간이 없어진지도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났지요. 수 천 년 즈음 지났다고 알고 있는데......."
  라니아도 아마 어딘가에서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나에게 이야기를 해 주었을 것이다. 세니티아 행성계를 넘어 성계권에 인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인류가 사라진지도 이제 수 천 년이 넘게 지났다는 것, 그리고 세니티아 본성의 인류 세계 멸망 이후로 세니티아 본성 주변에 있던 인류가 개척한 행성들은 본성과의 연을 끊고 독자적인 역사를 이어가려 하였지만 그나마도 세니티아 본성의 세계 멸망을 전후해 2, 3 세기 내에 각자 다른 이유로 재난을 겪었고, 그로 인해 세계가 멸망해 사라졌음은 학문과는 다소 거리가 있던 나와 아네샤도 아는 이야기였다.
  "그 당시 인류의 개척지였던 행성들은......."
  "에르세치아(Ersecia), 가마로드(Gamarode) 그리고 아르데이스(Ardeis) 와 조하르(Zohar) 등이 있지요." (*)
  이후, 라니아가 인류의 개척지 행성들에 대해 언급을 하려 하자 아네샤가 바로 라니아에게 그 행성들이 무엇인지를 말해 주었다. 그리고 아르데이스나 조하르의 경우에는 세니티아 본성에 못지 않은 인류의 역사가 펼쳐지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었는데, 문제는 그 모든 것들이 역사 수업 시간에 그가 배운 바 그대로였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렇게 써 먹힐 줄은 몰랐는데.......'
  그 모습을 보며 그렇게 혼잣말을 하고 있을 즈음, 라니아가 아네샤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향하며 밝아진 목소리로 "맞아요." 라는 말을 건네더니, 이어서 아르데이스와 조하르는 오래 전부터 인류의 개척지로서 인류가 거주해 왔던 곳으로 알 만한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다고 말하고서 수많은 구 문명의 흔적들이 두 행성계에서 다수 발견되었다고 말했다.
  "아마도 라르니온(Larnion) 등의 구 문명의 흔적이 선명히 남은 곳들보다도 더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고 있을 거예요. 두 분께서도 한 때는 금단의 땅이라 칭해지던 라르니온에서 수많은 구 문명의 유물들이 발견되어 많은 이들을 주목시킨 것은 알고 계시지요?"
  "이야기는 들었어요." 라니아의 물음에 내가 차분히 목소리를 내어 답했다. 그러한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마을 회관의 소식지를 통해 바로 접해 보았기 때문이었다. 기계 세력이 점거하던 곳이라 오랫동안 금단의 땅이라 칭해지고 있었고, 그 이후 기계 세력이 몰락하면서 봉인이 해제되고 사람들의 출입이 가능해졌지만 한 동안 출입할만한 사람들이나 모험가들만 출입하고 남은 이들은 관심조차 주지도 않았던 곳으로 알고 있었는데, 어느새 라르니온의 해안에는 여러 큰 도시들이 생겨나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그 즈음에서 들을 수 있었다.
  "그 때, 이런저런 대도시들이 생겨났잖아, 서부 해안의 캬리호(Kyariho) 라든가, 아니면 미냐시아(Minyasia) 같은 곳들 말야."
  캬리호와 미냐시아는 신생 대도시로 손 꼽히는 곳들 중 하나이다. 사실, 신생 대도시라고 해도, 거주민이 2 ~ 3 만 정도라 다른 곳-특히 베라티사(Beratisa)- 의 진짜 대도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기는 해도, 파브니드 (Favnid) 급의 도시가 새로 생겼다는 것에 대해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어쩌면 그 만큼, 모험가들과 겁 없이 새로운 개척지에서 삶을 이어가려 한 이들로부터 들려오는 밝은 전망이 많은 사람들을 움직였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세니티아의 정령들 중에서는 불과 땅의 정령들, 그리고 빛의 정령들이 많이 이주해 왔다. 산악 지역에서의 삶이 익숙하고 거주지가 일정치 않기도 한 바람의 정령들이나 바다에서의 삶을 선호하는 물의 정령들은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고-해안으로 오는 물의 정령들이 몇 있기는 했다-. 베라티사에서 이주해 온 마녀 일족들도 많았다고 했는데, 그래서 이후의 소식을 들어보면 내륙 지역은 베라티사 성계의 도시들과 비슷한 분위기를 내는 곳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는 모양.
  이러한 신경지로의 이주를 불러온 것이 바로 라르니온의 유적 지대 및 유물 발견이었다. 예로부터 구 문명의 잔재들을 이끌고 있던 기계 병기들의 거점이었고, 그래서 구 문명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누구나 라르니온 봉인 해제 가능성에 주목을 해 왔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라르니온의 봉인이 해제되고, 라르니온이 기대한 바 이상으로 거주하기 좋은 곳이라는 이야기가 들려오기 시작하고, 더 나아가 수많은 유물들이 라르니온에 매장되어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오자마자 유물들에 관심이 많았던 이들이 유물 탐사에 나서고, 유적과 유물의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이들이 오고 그들을 맞이하는 이들, 유적과 유물을 보기 위해 왔다가 아예 그 곳에 거주하게 된 이들을 위한 거주지들이 마련되면서 여러 마을들이 생기고 이들 중 일부는 도시가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아르데이스와 조하르에 대규모의 구 문명 유적과 유물들이 있다는 이야기는 오래 전에도 들어본 바 있었다. 조하르 성계의 경우에는 빛의 정령이 폐허를 정화했다고 해도 지하 깊은 곳까지 그 정화가 닿았을 리는 없고, 그래서 지하에는 폐허로 남은 고대 유적과 유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이것들의 규모가 얼마나 될 지 쉽게 가늠하기 어렵다고 하며, 아르데이스의 경우에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구역 외 구역들에 수많은 유적과 유물들이 방치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 규모는 세니티아 성계의 유적을 아득히 넘어설 것이라는 의견이 매우 많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어서 세니티아 행성계보다 아르데이스, 조하르에 더 많은 구 문명의 흔적과 유물들이 있을 것임에 대해서는 크게 놀라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라니아의 말은 여기에 이외에 또 다른 행성계가 있을 수 있음을 알리고 있어서 내가 모르는 것 이상으로 그가 아는 바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외에 세니티아 성계에 있던 구 인류의 개척지들은 더 있을 것이라 생각해요. 하지만 이러한 행성계들이 얼마나 더 있을지는 실은 저도 잘 알지 못하고 있어요. 이미 폐허가 되어 잊혀진 곳도 있을 것이고, 개척에 실패해 버려진 행성들도 있겠지만...... 이러한 행성들은 기록에도 남지 않을 테니까요."
  그 말대로일 것이다. 인류가 거주하기는 했지만 적응하지 못해 절멸하거나 버린 곳들도 있을 텐데, 이런 곳들에서는 인류가 기록을 남길 리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라니아는 분명 인류 세계가 생성되기는 했지만 멸망하는 과정에서 문명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인류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기 어려운 곳이나 세니티아 성계권 밖에 있어서 세니티아 인들은 알지 못하는 곳들도 있으리라고 이야기를 이어 나아갔다.

  "그렇다면, 이 행성계에는 루시언 할아버지 이외의 또 다른 구 인류가 있나요? 만약에 있다면 구 인류의 존재에 관한 희망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여러 곳을 둘러본 적이 있었습니다만, 루시언 할아버지 같은 이는 이 행성계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거예요."
  혹시나 싶어서 물었지만 라니아의 대답은 역시나 싶은 대답이었다. 이 행성계 역시 인간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아직 듣지 못했지만, 인간이 없는 곳이었으리라는 직감이 있었고 그래서 세니티아의 인류, 그 후예가 남아있음에 대한 기대감은 크지 않았지만 그래도 루시언 노인 이외에는 없다는 이야기를 막상 듣고 나니, 허무한 느낌이 있었다.
  "분명 이 행성에도 문명의 흔적이 있어서 인류나 인류의 수준에 맞먹는 문명인들이 살았음은 분명해 보이는데."
  검은 안개가 드리워진 섬으로 가면서 마주했던 해역에서 해수면 위로 부서진 채 물에 잠긴 폐건물들을 목격했었고, 섬에는 아예 인류가 살았던 도시의 일부가 폐허가 된 모습인 채로 남아있기도 했다. 그 정도면 누구라도 인류의 거주 사실을, 적어도 선대 문명인들이 행성계에 모종의 사건으로 문명인들이 행성계에서 사라질 때까지 거주했음은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생각하신 바대로예요, 대륙의 어디에도 인류가 살았던 흔적은 있지만 인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어요."
  루시언이 언제부터 마을에 들어오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시피했다. 그는 라니아보다도 더욱 오랫동안 섬 마을에 살고 있었으며, 섬 마을이 생성되기 전부터 이미 그 일대에 거주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그는 행성계를 비롯해 우주의 어디에서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인간의 모습을 갖고 있었고, 그래서 라니아는 그 모습을 보면서 행성의 다른 어딘가에도 인류의 생존자가 아직 남아있을 것임을 확신하기도 했었다고.
  "제가 알바레스 곳곳을 돌아다니며 인류의 흔적을 찾으려 한 이유예요."
  "하지만 인간을 찾을 수는 없었다, 그 말씀을 하시고 싶은 것이었군요."
  "그래요......" 이후, 아네샤가 건네는 물음에 라니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인류가 행성계를 버리는 선택을 했다고 하더라도 소수의 사람들은 남아서 자신들의 후손을 남길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러한 흔적은 이미 사라져 없었다고 하였다.
  "여기는 고양이 족의 행성이었어요. 당연히 원래는 인류의 행성이었지만 재난을 겪은 인류는 그로 인해 행성계에서 사라졌던 거예요."
  "어떻게 사라진 거예요?" 이후, 아네샤가 다시 한 번 라니아에게 물었고, 이 물음에 라니아는 자신도 마을의 대장로를 통해 직접 이야기를 들어서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앉아 있기만 하면서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닌 것 같네요."
  라는 말을 건넨 이후에 곧바로 나와 아네샤에게 밖으로 나와달라 부탁하였고, 그리하여 나는 아네샤와 함께 라니아를 따라 그의 집을 나섰다. 그의 발걸음은 집 근처를 지나, 다리의 한 지점에 이르고 있었다.



  어느덧 새벽 늦은 시간이 되어 별빛이 잦아들고 하늘이 조금씩 파랗게 변해가고 있었다. 그 하늘을 바라보며 나는 다리의 오른쪽에 보이는 난간에 기대어 있었고, 아네샤는 그런 나의 오른쪽 곁에 서 있었다. 라니아는 다리 위를 지나가면서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는데, 이후에는 다리를 지나쳐 가려 했던지라 나와 아네샤 모두 그를 따라 나서면서 남쪽의 선착장이 보이는 방향을 따라 나아가기 시작했다.
  "저희 선조들에 대해서는 두 가지 가설이 있었어요, 하나는 원래 인류의 땅에서 인류에 저항하던 수인 세력의 일부였다가 수인 세력이 분열하기 시작하면서 우주 방주(Kosmoarko, Kosmoarka) 를 타고 행성을 탈출했던 고양이 족의 일부가 저희들의 선조가 되었다는 것이 첫째 가설, 그리고 원래 이 행성에 거주하던 인류가 떠난 이후에 행성에 남았던 고양이들이 선조가 되었다는 것이 두 번째 가설이지요."
  "그 중에서 정설로 채택된 것은......"
  라니아에 의하면 처음에는 전자가 정설이었으나, 이후, 고양이 족에 관한 이야기가 알려지고, 더 나아가 고양이 족과 마주했던 요정들의 후예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후자가 정설이었음이 확정되었다고 한다.

  이 행성은 본래 인류가 개척했던 수많은 행성들 중 하나로서 은하계의 가장 자리에 있는 행성에서부터 인류라 칭해진 종족은 여러 행성들을 향해 진출해 갔고, 마지막으로 이들은 은하 중심에 이르렀지만 어느 순간에 그들의 문명은 몰락하고 인류는 자신들의 거주지였던 지상에서 벗어나 그들이 만들어낸 인공 부유도로 거주지를 옮겨서 지상에는 남은 이들이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어떻게 인류의 문명이 몰락하게 되었던 것일까요?"
  "자세한 이야기는 없어요. 다만, 전염병이 퍼지면서 그로 인해 인류의 생활 기반이 무너지면서 인류는 전염병이 퍼진 지상을 떠나 공중의 부유도로 생활 터전을 옮기기로 하고 국가 차원에서 부유도로의 강제 이주를 행하기도 했었대요. 그렇게 되면서 대부분의 인간은 지상을 떠나고,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지상에 남게 되었다고 해요."

  어떤 전염병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이들은 거의 없다. 너무 오래 전의 일이었고, 그 당시의 전염병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기록도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류의 뒤를 이어 세상을 차지한 고양이들 그리고 그들의 후예인 고양이 요정들에게 있어서 그들에게 있었던 일은 관심 밖의 일이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 병으로 인해 '공포를 느낀' 인류가 지상을 포기하면서 고양이들을 비롯한 동물들이 자신들의 영역이었다가 인류에게 내 주었던 영역을 되찾았다는 것이었다.
  고양이 족의 직계 조상이라 칭해지는 이들은 고양이들 중에서 지상에 남겨진 어떤 여인이 보살피고 있던 고양이들이었다고 한다. 어렸을 때에 모종의 이유로 인해 지상에 남겨진 여성은 자신처럼 지상에 '버려진' 집 고양이들을 데려와 키우기 시작했고, 문명의 빛이 사라지고 숲으로 변해가는 거리에서 고양이들의 쉼터를 마련해 준 이였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여러 곳에서 길고양이, 들고양이였던 이들이 여성의 거처를 드나들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여인의 거처를 중심으로 고양이들이 하나의 작은 세상을 만들게 된 것이 고양이 족의 시작이었다.
  이후, 여인이 세상에서 사라지면서 고양이들은 외로움 속에서도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 준 여인을 신으로 받들기 시작했고, 이를 신과 고양이가 함께 있었던 시절로서 '노을빛 신의 시대 (La Ora Epoko de Deo, Novlficain Gomaepoka)' 라 칭한다. 이후, 고양이들은 그들 사회에서 가장 많은 자식을 낳은 은회색 털을 가진 암코양이를 여왕으로 삼았고, 그 자식들이 여왕의 대를 이어가는 왕국이 형성되니, 이를 '은빛 왕국 시대 (La Arĝenta Epoko de la Regno, Giyin Imgïmnalyaepoka)' 라 칭한다고.

  "금의 시대에서 은의 시대로 넘어간 것이로군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이 곳의 고양이들은 금빛을 '노을빛' 이라 칭하니까요."
- 고양이들 중에서도 금빛(La Oro, Lora) 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이들은 있다고 하며, 이외에도 버터 빛(La Butero, Gudïjeshfica) 이란 표현을 사용하는 이들도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라니아 그리고 일행의 발걸음은 다리를 지나쳐, 그 남쪽 건너편의 선착장과 가까운 십자로를 향하고 있었다. 머지 않은 앞에 클라리스 그리고 미라의 집이 보였다. 비록 건물 자체는 평범했지만 현관문에 KLARIS/MYRA 라 적힌 간판이 있어서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그 집을 라니아가 지나쳐 갈 때에는 라니아는 달리 말을 하지 않다가 나와 아네샤가 그 집을 지나쳐 가려 할 무렵이 되자 라니아가 뒤따라 가던 나와 아네샤를 향해 고개를 돌리면서 물었다.
  "저 집이 클라리스, 그리고 미라의 집이에요. 알고 계셨나요?"
  "예, 직접 드나든 적이 있어서요." 이에 내가 바로 알고 있었다고 답했다. 이에 라니아는 "그렇군요." 라고 말하더니, 자신은 혹시 그 집이 어디인지 모를 수 있을 것 같아서 그 집이 어디에 위치해 있으며, 집의 특징으로 무엇이 있는지에 대해 알려주려 했었음을 밝히고서 그 집의 위치를 알고 있다니 다행이라고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가기도 했다.
  이후, 길 건너편의 한 곳에 자리잡은 리에타의 대장간이 보였다. 새벽 시간이라 그러한지 공방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 굳게 닫힌 대장간의 모습을 보면서 라니아는 리에타에 대해 그는 정말로 클라리스, 미라에 대한 걱정이 많았던 것 같다고. 그리고서 그러하지 않았다면 대장간에서의 일도 마다하고 클라리스, 미라를 맞이한다고 글라이더를 마련해서 가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그에 대해 이어 말하기도 했다.
  "리에타 씨는 클라리스 씨가 참 좋았나 봐요."
  "이 곳에서는 두 아이들을 가장 좋아한다고 자기가 직접 말하기도 할 정도이니까요."
  그렇게 말을 이어가더니, 라니아는 말을 잠시 멈추고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혹시 리에타가 숨어서 듣고 있는 것은 아닌가, 했었던 모양이었지만 나와 아네샤는 그러할 리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그 점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을 쓰려 하지는 않았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리에타 씨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가 봐요."
  "남들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리에타는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아요."
  그 물음에 라니아는 리에타가 클라리스 그리고 미라가 가장 좋다고 말하는 것을 다른 이들이 다른 이들 앞에서 밝히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고 답하고서 언젠가는 본인이 고백하는 날이 오기는 하겠지만 당장의 일은 아닌 것 같다고 그에 대해 이어 말하기도 했다.
  '신' 이 사라진 이후에도 고양이 족은 '왕의 시대' 에서 왕들의 다스림을 받으며 나름 안정적인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고 한다. 다만, '신' 이 행했던 역할을 '왕' 이라 칭해진 고양이와 그 일족이 대신했을 뿐. 다만, 그 고양이를 비롯한 고양이 족은 '신' 처럼 전능하지는 못해서 '신' 이 할 수 있었던 몇 가지 일들을 해낼 수 없었고, 신의 과업을 재현하기 위해 여러 고양이들이 여러 세월 동안 고생을 해야 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수코양이가 아니라 암코양이가 지도자가 되게 된 거예요?"
  "그 부족의 암코양이에게는 다른 이들이 가지고 있지 못한 무언가가 있기라도 했었나요?"
  문제는 힘이 센 수코양이가 아니라 암코양이가 부족의 지도자에 이어 고양이 나라의 여왕으로 군림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이는 동물에 관한 일반적인 상식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사항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네샤도 그렇지만 나 역시 동물 집단의 지도자는 대개 집단을 형성할 때, 많은 경험을 겪었을 나이 많은 수코양이나 힘이 센 수코양이가 지도자로 삼는다고 여기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리에타가 바다 쪽으로 시선을 향하며 발걸음을 옮기면서 조용히 목소리를 내어 답하였다.
  "하나의 거대한 집단을 이루면서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이지요, 그 누구도 많은 일가족을 거느린 이들을 이길 수는 없다는 것."

  한 번씩 고양이들은 싸움을 하고는 했다. 어떤 때에는 무리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어떤 때에는 먹이나 자리 때문에, 심지어는 별 이유도 없이 서로가 서로에게 싸움을 걸고는 했다. 그런 싸움이 있을 때, 자식을 거느린 고양이는 그 자식들이 싸움에 가담해 왔고, 서로 싸우게 된 이들 중 하나가 누군가의 자식일 경우, 그 어미와 형제, 자매들이 다른 일을 마다하고 가담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고양이들은 부모가 되고, 자식들이 아기에서 벗어나면 자식들을 독립시키는 습성이 있었다. 하지만 자식들과 함께 무리를 이루어 살게 된 집고양이들이 부족에 가담하면서 그들의 습성이 가족들을 거느린 고양이들로 이어진 것.
  역사가 이어지면서 고양이 족의 일원들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 가족이 많은 것, 자식이 많은 것, 형제가 많은 것은 곧 힘과 이어진다는 것. 여섯 고양이의 어미였던 암코양이가 여왕이 된 것은 이러한 생각에 기인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섯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워내 어미로서의 소명을 제대로 다한, 힘이 센 암코양이가 '신' 을 대신해 고양이 일족의 왕이 될 자격이 있다 여기어진 것.
  고양이 족은 여왕으로부터 '신' 이 가진 자비로움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여왕은 '신' 은 절대적인 힘이 있었기에 고양이들을 다스려 왔다고 여기었고, 그 역시 '신' 이 행한 바대로 절대적인 힘을 행사하며 '신' 의 부재를 겪은 고양이들을 힘으로 복종시키려 하였다. 이 생각은 잘 통해서 고양이들은 여왕의 절대적인 힘에 대체로 순종하려 하였고, 왕국은 '신' 이 있었던 시절만큼 평화로웠다. 비록 곳곳에 크고 작은 갈등이 있었고, 그로 인한 불만도 적지 않았지만, 이후에 있을 동란 시대를 생각하면 이상적인 시대라 칭할 수는 있었을지도 모른다.

  "동란 시대라고요?"
  "예, 그런 시절도 있었지요. 외적의 침입으로 수많은 고양이 일족들이 죽고 그 이후로도 마땅한 지도자가 없어 크고 작은 세력들이 난립하면서 일어나는 투쟁으로 인해 계속 희생자가 생겨났던 그런 시절이지요."
  발걸음은 선착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아직 해는 떠오르지 않은 선착장 너머로 바다가 평온한 무늬를 그리면서 하늘과 만나 하나의 선을 그려가고 있었다. 물새 한 마리 보이지 않는 바다에는 그저 바람 소리만 조용히 울려 퍼지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라니아는 주로 집에 머무르고 있기는 하지만 이따금 집을 나서서 선착장 쪽으로 나아가고는 한다는 말을 했었다. 주로 새벽 시간 대에 나가며 그 때마다 조용히 물결치는 바다를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고는 했었다는 말을 하기도 했었다.
  "자주 하지는 못하시는 것 같아요."
  그 이야기에 내가 자주 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하자, 라니아는 바로 그렇다고 답했다. 그리고서 근래 들어 린나가 부쩍 크면서 새벽에도 뛰어놀려고 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말했다. 자라날 수록 더욱 활발해지는 것도 좋지만 너무 격렬해지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 그리고 바다를 향하는 방향에 서 있다가 내가 우측 곁에 이르자마자 나를 향해 잠시 고개를 돌리면서 물었다.
  "라르나 씨께서는 어렸을 때 어떤 사람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나요?"
  "저요?" 나는 어렸을 적에는 유난히 활발했다던가 유난히 얌전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고, 이는 지금도 그러하다. 그 활발함이 극성이었던 이는 내 주변에는 아마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어렸을 때에는 집 안팎을 가리지 않고 왁자지껄하게 놀기는 했지만 내 주변에 있던 바람의 정령들도 대략 그러했고, 그래서 바람의 정령들은 어린 시절을 지나고 나야 본래 성격이 나온다는 말이 들린 적이 있기도 했다. 그 때, 아네샤가 나의 오른편 옆에 이르더니 라니아에게 나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또래들 중에는 그래도 얌전한 편이었고, 공부도 나름 잘 하는 편이었어요. 괜히 마법사 노릇하는 것은 아닐 거예요."
  정식 마법사는 아니기는 했지만-물의 정령, 바람의 정령들 중에는 정식 마법사는 정말 드물다- 그래도 나름 번개, 전기에 관한 마법을 사용한다고 해서 마법사로 여기어지고는 했었다. 이후에는 아네샤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이후의 일이다.
  "그러고 보니, 너, 어렸을 때 나한테 공부 못 한다고 막 뭐라 했었지? 바보 같다고 놀리기나 하고 말야!"
  그러다가 문득 예전의 서운했던 일이 생각났었는지 나를 보며 그렇게 말하더니,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정말......" 이라고 말하면서 왼쪽 다리로 엉덩이 쪽을 차려고 했다. 정말로 강타를 가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심 서운한 마음이 들어갔던 탓인지 꽤 아팠다.
  "왜 예전의 일을 새삼스레 꺼내며 발로 차기까지 해?"
  갑작스레 당한 일이었던지라 놀라면서 물었고, 이에 아네샤는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분이 풀리지 않아서 그러하다고 답했다. 그 이후, 라니아는 놀라면서 나와 아네샤 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리더니 나에게 아네샤를 공부 못 한다고 놀린 적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예, 어렸을 때에는 그랬었어요." 아닌 것이 아니라 어렸을 때에는 나중에는 사소하다고 여기어지는 것 하나도 자랑하고 싶어했었고, 그래서 나름 시험 성적이 좋았던 것에 대해 자랑을 하면서 시험 성적이 당시에는 상당히 저조했던 아네샤를 놀리고는 했었다. 그 이후로 한 동안 아네샤는 '바보같은 애' 라는 소리를 늘 듣고는 했었다는데, 그 일이 내심 서운했었다는 것. 하지만 그렇게 아네샤를 놀려댔던 것도 그 때가 거의 마지막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이후로 아네샤의 학업 성적이 아주 좋아졌기 때문.
  "학업을 더 잘 했다고, 아니, 학업 이외에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뭔가를 더 잘 했다고 우월감을 함부로 드러내면 안 되기 마련이에요. 다음부터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아무래도 아직 어린 아이의 엄마이다보니, 그런 점에서 민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그로 인해 아네샤와 다툰 일이 있기도 해서 다음부터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던 것도 있어서 바로 라니아, 린나의 어머니에게 그런 일이 없도록 늘 조심하고, 조심하겠다고 답했다.

  왕가에 의한 평화 (Pax Regina) 가 영원토록 지속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오래토록 이어진 평화의 여파는 고양이 족에게 좋은 영향만 끼친 것은 아니었다.

  "악 영향도 있었다는 것이네요, 그렇지요?"
  "그렇지요. 평화로운 삶의 지속은 분명 종족에게는 좋은 일이어야 했고, 그렇게 되어야 마땅했어요. 하지만 사냥과 전투가 일상의 일부였던 종족에게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았던 모양이에요."
  "늘 사냥과 추적으로 날이 선 듯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을 텐데, 신과 왕가가 구축한 평화 속에 익숙해지면서 그런 기강이 약화되고, 종족 구성원들의 마음도 그에 따라 해이해졌다고 볼 수 있겠군요."
  아네샤에 이어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말했다.

  평화 그리고 평화롭다. 이런 것이 상존하는 세상은 사람들에게 지속적인 삶의 여유와 즐거움을 주고, 이것은 사람들 그리고 종족의 삶에 이로운 영향을 지속적으로 가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가해야 함이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실로 유감스럽게도 이것이 때로는 사람들, 아니 종족 구성원들에게는 늘 좋은 것만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물의 정령들에게 늘 명심해야 하는 말이 있다고 한다. '언제나 강적은 있어야 한다 (Nilë ajena syenarwesa yiseya, Ajina si-ënin arwesa -üs eya)' 라는 말. 또 어딘가에서는 이러한 낙서도 적혀 있었다. 태고 시대의 낙서는 아니고, 아마 선대 바람의 정령들이 쓴 문구였을 것으로 후손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 누군가가 했던 말을 옮겨 적었을 것임이 분명했다 : '사냥감이 없는 사냥꾼에게는 존재 의미가 없다 (Preda nasin shinya-yndr-e -yisiy gada nas. Preda nasin shinya-yndr yekhe -üsiy gadh nas)' 라는 말. 사냥꾼에게 있어서 사냥감은 늘 있어야 한다는 말로, 사냥꾼으로 태어났다면 사냥이라는 험난한 시련은 늘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바람의 정령으로 칭해지는 이들이 어떤 정체성을 갖고 있는지, 그리고 그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말이었을 것이다.
  또, 이런 말이 있다. '강적 없는 세상은 칼날을 무디게 하고, 시련 없는 사람은 쉽게 두려움에 빠진다 (Syenin arwesadër nasin nuli nalëdrël mutuhy a, eligil nasin saramidër droi-e sybely paji, Si-ënarwesadr nasin lurï naledrîl mîtuhya aeligil nasin saramidr dryoiye suibely faji)' 라는 말. 어디서 전파됐는지는 알 수 없기는 하지만 정령들 사이에서는 많이 퍼져 있어 격언처럼 여기어지고 있는 말이다. 오히려 평화가 상존하는 세상을 경계하라, 그리고 늘 강적과 마주할 자세를 취하라, 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그런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하네요, 강적 없는 세상은 칼날을 무디게 하고, 시련 없는 사람은 쉽게 두려움에 빠진다, 라는 말이 있어. 어쩌면 그 평화로 인해 선조 대대로 사냥꾼이었던 종족이 해이해지면서......"
  "그 말씀들 대로예요." 이후, 나와 아네샤의 말에 대해 라니아가 동의하는 화답을 하고서는 오랜 평화가 고양이 나라 백성들의 기강을 해이하게 만들었고, 그것이 멸망을 부르는 요인이 되었음을 밝혔다.

  고양이 나라의 평화는 대대로 영속히 이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주변에 고양이들을 위협하는 맹수가 없었던 세상에서 문명의 이기에 힘 입어 손쉽게 얻은 평화는 고양이들을 쉽게 나태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최초의 고양이 여왕과 그 자식들은 강인한 정신을 유지하려 하고는 있었지만 후손 대대로 그 정신은 퇴색해 갔다. 적어도 5 대 손까지는 강인한 기강을 유지하며 고양이 나라가 깨끗한 정신을 유지할 수 있도록 기강을 바로잡고 있었지만 그 이후로는 그렇게 하지도 못 했고, 문명의 이기에 빠진 왕가의 후손들은 점차 나약하고 나태해져 갔다.
  이러한 왕국을 무너뜨린 것은 그간 존재하지 않았던 외부의 침입으로 하나의 작은 지역에 수많은 고양이들이 살고 있는 현장이 고양이들의 나라 주변 일대를 거닐던 들개들에게 우연히 포착된 것이었다. 그 들개는 고양이 경비대에 의해 격퇴되었지만 머나먼 지역에서 온 들개는 그 지역에 살던 들개들을 비롯한 맹수들에게 고양이들의 나라가 있는 곳의 존재를 알게 만들었고, 이는 맹수들의 대대적인 침입을 불러오게 되었다.

  "그 때에 수천의 맹수들이 몰려왔다고 해요. 평화 속에서 나태해진 고양이들의 풍만한 육신을 노린 이들이 많았고, 고양이들이 가진 것들을 노린 이들도 적지 않았대요. 이런 상황에서 신과 왕가의 가호 아래에 있던 이들과 최초의 여왕 그리고 그 자손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었지요, 그들의 자손들이 선조들을 대신해서 그들이 지켜왔던 나라를 맹수들로부터 지킬 의무가 있었지요. 신과 위대한 여왕이 떠나고 오랜 시간이 지난 그 때가 그 후손들이 얼마나 그 의무를 이행할 수 있었을 것인지를 가르는 때가 온 거예요."
  "하지만 후손들은 오랜 평화 속에서 기강이 해이해져 있었다고 하셨잖아요, 그렇다면...... 맹수들의 습격에 선조들을 대신해 맞서야 할 텐데, 그 이후로 그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두 분들께서 지금 예상하시고 계신 그대로일 거예요."

  하지만 처음부터 고양이들은 자신들의 나라에서 누가 침입을 해 오든, 두려워하지 않고 있었으며, 심지어 어떤 맹수들이든 얼마든지 쫓아내고 죽일 수 있다는 자부심까지 드러내고 있었으며, 이는 신과 선조들은 갖지 않았던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자신감은 그들이 신과 선조들보다 용맹함에 기인한 것이 아니었으며, 맹수들의 위협에 대한 인지를 하지 못한 탓으로 야생에서 들개들을 비롯한 길짐승들이 고양이들에게 큰 위협을 가할 수 있음을 신은 알고 있었고, 신의 가호 속에서 살았던 고양이 나라의 초기 고양이들 역시 신의 가르침을 통해 맹수들의 위협을 잘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고, 맹수들이 없는 평화가 계속되면서 대대로 이어졌어야 할 맹수들의 위협과 그것에 어떻게 맞서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의 전승이 끊어지면서 그 후손들이 맹수들이 얼마나 자신들을 위협할 수 있는지 조차 모르게 된 채로 선조들이 나라를 굳건히 지켜온 자부심에만 의지하게 된 산물이었다.     "이후의 상황은 모두 예상하실 수 있으시겠지요?"
  선조들로부터 이어져야 했었을 맹수들에 대한 가르침 없이 자만심만 가득한 채로 굶주림 속에서 암수 노소 가리지 않고 사납게 달려드는 맹수들을 맞이하게 되었고, 그 이후의 결과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법했다. 전선에서 맹수들과 맞서 싸우려 한 고양이들 대다수가 맹수들의 습격 한 번에 일방적으로 몸이 찢겨지다시피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고양이 나라의 국경선은 그렇게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난생 처음 보는 처참한 풍경, 몸이 찢어지고 내장과 뼈가 흩어지는 광경에 바깥 세상을 몰랐던 고양이들은 이성을 잃기 시작했다. 자부심은 공포로 바뀌고 웃음 소리는 비명 소리가 되었으며, 앞장서서 싸워 나아가는 당당함은 뒤로 물러서는 공포심과 이루어지지도 않을 애걸 속에서 살해당하는 비굴함과 비참함으로 바뀌고 있었다. 아무걳도 모르고 있을 시민들을 지켜야 할 방패는 그렇게 사라지고 피로 물든 맹수들이 수많은 고양이들이 모여 있었을 영역으로 무자비하게 쇄도해 갔다.

  "당시에 그 영역에는 수만의 고양이들이 살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오랜 평화 속에서 고양이들이 수없이 많은 아이들을 낳아갔으니, 그 만큼 많은 고양이들이 고양이들의 나라에 살고 있었다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그 이후로 살아남은 고양이들의 수는 수백 정도에 그쳤다고 해요."
  "그 만큼 많은 고양이들이 그 사건에서 살해당했다고 볼 수 있겠네요."
  라니아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아네샤가 진지하게 목소리를 내며 말했고, 라니아는 그 말에 나지막히 '그렇지요.' 라고 답했다. 평화로웠던 생기의 거리가 피로 얼룩진 죽음의 거리가 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는 말이 그에게서 나왔다.

  하지만 소수의 살아남은 고양이들 중 일부는 특유의 싸움, 사냥 본능을 일깨워 가며, 맹수들과 맞서 싸우려 했지만 맹수들의 치열한 움직임을 이겨내지는 못 했고, 그들과 맞서 싸웠던 고양이들은 맹수들 앞에서 역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맹수들은 고양이들을 마구 죽이고 물어뜯고 잡아먹기를 거듭한 끝에 살아남은 고양이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즈음에 모든 것을 그치고 떠났다. 일부 고양이들은 수풀, 나무의 좁은 틈, 구덩이 등에 숨어 겨우 살아남은 극소수에 불과했고, 이들은 피와 피 냄새 그리고 처참한 풍경만 남은 자신들의 수도를 등지고 떠날 수밖에 없었으며, 각자의 영지에서 각자의 왕국을 구축하며 살게 되니, 이것이 하나의 고양이 나라가 멸망한 이후, 그 폐허 주변에 생긴 작은 나라들이었다. 이 고양이들의 후손이 자신들의 옛 땅을 되찾을 때까지는 다시 몇 세대를 거쳐야 했으니, 그 때를 '연기빛 절망의 시대 (ßaeficain Gamzbarey jelukh)' 라 칭한다고 했다.
  몇 세대가 또 지나고, 이런저런 이해 관계로 작은 나라들이 갈등과 투쟁을 거듭하고 있을 즈음, 폐허만 남았을 옛 고양이들의 수도에 한 무리의 고양이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하나의 하얀 고양이를 '신의 현신' 으로 믿는 이들이었으며, 올바른 삶과 신을 향한 훌륭한 신앙심이 '새하얀 고양이 신' 이 사는 '무지개 나라' 로 고양이들을 인도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이후, 하얀 고양이의 일족인 하얀 고양이들은 '신을 대리하는 자들' 이라 칭해지고, 이들이 곧 '성직 계급' 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 성직자들이 옛 고양이들의 나라의 중심에 있던 신의 집을 신전으로 삼고, 그 주변 지역을 성소로 삼았으며, 이후에 이웃한 곳에 자리잡은 갈등과 투쟁을 거듭하는 작은 왕국들을 통솔하는 역할을 맡게 되니, 이를 '하얀 사제들의 시대 (=ayain Sakraidrï Jelukh)' 라 칭한다고.

  "이후로 시대는 계속 변천해 갔지요. 오만해진 하얀 사제들의 횡포에 검은 고양이들이 맞서려 한 흑백의 시대 (=ayagamzï Jelukh)', 신에게 복종하는 것만 생각했던 고양이들이 신에게서 벗어나기 시작하고 신에 종속되는 것이 아닌 자신의 길을 찾아 나서려 하였던 '삼색 각성의 시대(Kalikoin Kheday Jelukh)' 가 이어지게 되었지요. 그 과정은 이전에 비하면 대체로 평화롭게 이어지고 있었지만......."
  "한 가지 비극적인 사태가 또 있었네요, 그렇지요?"
  이후, 이번에는 라니아에게 내가 물었고, 그 물음에 라니아는 그렇다고 답했다. '흑백의 시대' 와중에 하나의 큰 전쟁이 일어났고, 그 전쟁에 '고양이들의 성지' 가 되었던 고양이들의 옛 수도가 다시 한 번 처참한 폐허가 된 일이 있었다고 답했다.

  어느 검은 고양이가 중심이 된 이들은 '신앙의 원점 회귀' 를 주장하며, 신앙을 가진 이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오직 선행과 믿음을 통해서만 무지개 나라로 나아가, 신의 곁에 이를 수 있다는 그들의 사상은 부패한 신앙에 질려버린 고양이들을 크게 감화시켜 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러한 움직임이 하얀 사제들을 크게 동요시키니, 이러한 움직임 자체를 하얀 성직자들이 자신의 권세를 크게 뒤흔들어 버릴 크나큰 '재앙' 으로 여기었음이 그 원인이었으며, 하얀 사제들이 개혁에 찬동한 이들을 잔인하게 처형하며 본보기로 삼은 것이 화근이 되었다.
  나라와 나라 간의 격돌에 하얀 성직자들이 관여하면서 그 여파로 그 거점이었던 신전 일대가 싸움으로 인해 지도자를 잃고 분노한 사냥꾼 고양이들의 표적이 되었고, 사냥꾼들은 신전 일대를 습격해 일대에 거주하는 성직자들을 비롯한 고양이들을 마구 물어뜯어 죽여 버렸다. 이로 인해 수많은 사제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신의 대리인' 은 신전에서 도망쳐 어느 풀숲 속에 숨어 간신히 연명했다. 사냥꾼들은 검은 고양이단의 신앙에 찬동하는 자들이었으며, 그들을 향한 사제들의 탄압과 잔혹사에 분노하고 있는 이들이었기에, 사제들을 죽이는 데에 거리낌이 아무것도 없었다고 했다.
  이러한 만행으로 인해 신전 일대는 예전의 맹수 습격에 준하는 수준의 폐허가 되어 버리고, 한 동안 아무도 살지 못하는 곳이 되고 말았다. '무지개 나라' 의 재현이 곧 '불타는 나라' 의 모사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이렇게 '불타는 나라' 가 되어버린 곳을 '무지개 나라' 로 되돌리기 위해 수많은 세월이 필요했고, 또 수많은 고양이들의 노력이 필요했다.

  "이는 전쟁으로 이어졌고, 그 전쟁으로 다시 수많은 고양이들이 죽고, 그 이후로 무지개 나라와 하얀 고양이 신을 받드는 신앙이 퇴색하면서 삼색 각성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지요."

  삼색 각성의 시대가 되면서 고양이들은 새로운 문명을 일으키려 하기도 했고, 새로운 개척지를 개척해 나아가기도 하였지만 어떤 일이든 잘 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 와중에 고양이들이 더 이상 신과 무지개 나라 신앙을 받들지 않게 되면서 신앙에 의지해 함께 살아가던 이들이 소수의 집단으로 흩어져 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사제들이 거주하던 옛 고양이 나라에도 수많은 씨족, 부족 군락이 생겨날 정도에 이르렀다고. 이후, 시대는 현대로 이어지게 되었지만 더 이상의 발전 상은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고양이들의 후손들이 라니아 씨 등과 같이 사람의 모습을 갖게 되었나요?"
  이후, 아네샤가 고양이들의 후예가 어떻게 사람의 모습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려 하였고, 라니아는 조용히 눈을 감으면서 하나의 사건에서 비롯되었다는 말을 나와 아네샤의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써 건네면서 그것에 관한, 고양이들의 나라 그리고 자신의 선조들인 고양이들에 관한 마지막 이야기로써 전하기 시작하였다.
  "이야기의 마지막은 옛 고양이들의 나라, 그리고 고양이들의 신전이 있던 곳 인근의 마을에서 시작하지요."

  신전은 여전히 기능을 하고 있었지만 종교가 쇠퇴하면서 하얀 사제단, 검은 고양이 사제단의 사제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진 상태였고, 하얀 사제들의 후손들 중에서 소수만이 남아 신전을 지키고 있으면서 신앙을 지탱하고 있었으며, 일대의 마을들에서는 그래도 신앙이 그럭저럭 유지되고 있었다고 한다. 사건은 그 마을들 중 하나에서 발생했다고 한다.
  "고양이들이 숲길을 거닐다가 우연히 자신들과 다른 모습의 누군가를 목격했었어요."

  "엄마, 무슨 이야기를 언니들과 그렇게 오래 해요?" 그 무렵, 나의 뒷편에서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고,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린나가 라니아의 곁에 있었으며, 키아라가 그들의 뒤에서 라니아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린나가 새벽이 밝아오도록 어머니가 집에 오지 않자,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키아라에게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같이 가자고 청하면서 그들과 함께 항만으로 가면서 어머니를 발견하게 된 것 같았다.
  "린나가 어머니께서 걱정이 되었나 봐요, 그래서 이렇게 일부러 찾아왔어요."
  그러자 라니아는 이야기를 하다 말고, 자신의 딸 그리고 키아라를 향해 돌아서더니, 린나를 향해 다가가서 걱정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말하고서 곧 린나가 있는 곳으로 찾아갈 테니, 좋은 곳에서 언니와 같이 놀고 있으라고 부탁을 했다. 그리고서 라니아는 린나에게 어디로 가서 놀고 싶냐고 묻자, 린나가 바로 답했다.
  "리에타 언니가 있는 곳, 대장간이요~." 이에 라니아는 환하게 웃으면서-살짝 당황한 기운이 엿보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라니아는 부모 입장에서 린나가 리에타처럼 크기를 원치는 않고 있었던 모양- 원한다면 그렇게 하라고 답했고, 이후, 라니아는 린나에게 키아라와 함께 있다가 오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키아라에게는 린나를 잘 보살피고 있다가 적절한 때에 집으로 데려올 것을 부탁했으며, 이에 키아라는 알겠다고 화답하고서 그렇지 않아도 린나는 혼자서도 잘 뛰어다니고 길도 잘 찾으니, 그에 대해서는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이라 말한 이후에 린나가 리에타의 대장간이 있는 곳으로 뛰어가려 하자, 그런 린나를 따라 나아가는 것으로 라니아의 곁에서 린나와 같이 멀어졌다.   그 무렵, 잠시 하늘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를 보려 하였다. 라니아의 이야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이미 하늘의 오른편에서 태양이 조금씩 떠오르고 있어서 이야기가 시작됐을 때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났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무렵, 아네샤가 다시 일행의 곁으로 오는 라니아의 모습을 보더니, 그에게 벌써 해가 떠오르려 하고 있음을 말했다. 그 무렵, 라니아는 일행의 왼편에 약간 거리를 두는 항구의 발판 가장자리에 다리를 걸치며 앉았으며, 이후, 아네샤가 건네는 말에 바다를 향하는 채로 활짝 웃으며 화답하고 있었다.
  "그 만큼 시간이 빨리 지나가고 있음을 의미하겠지요?"

  오랜 세월 동안 고양이들은 고양이 그리고 숲에 사는 짐승들의 모습만을 보아 왔었다. 그런 그들에게 인간의 모습을 가진 이들의 등장은 크나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여기에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보니, 그 모습을 목격한 고양이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마을에 있는 장로의 집으로 뛰쳐 들어가 장로에게 그간 벌어진 일을 밝히려 하였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장로는 크게 놀랐다, 처음에는 외계 생명체의 침입일 것으로 여기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외견의 묘사를 듣고 난 이후, 장로의 생각은 바뀌었다. 고양이들의 숲을 찾아온 빛의 존재는 다름 아닌 '신' 이 보낸 사자들 혹은 '신의 일족' 일 것임이 분명하다고 여긴 것이었다. 오래 전의 전승으로만 남았던 신의 모습에 관한 기억을 토대로 숲에 나타난 이들이 '신' 과 닮았다고 여기며, '신의 사자들' 혹은 '신의 일족들' 이라 여긴 장로는 언젠가 숲으로 그들이 다시 찾아올 것으로, 신의 일족이 다시 찾아오면 그들의 세상으로 고양이들이 찾아갈 수 있도록 하겠노라 다짐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후, 고양이들의 마을 인근에 날개를 가진 '신' 과 닮은 이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었고, 고양이의 장로는 그들에게 '신의 세상' 을 들를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간청을 하니, 그들은 그 부탁에 그들은 그들이 있던 바닥에 빛으로 원을 그리더니 그 안에 복잡하게 생긴 무언가를 그린 이후에 그 문양이 빛을 발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마법진의 일종이었던 것을 고양이들은 문양으로 이해했었나 보네." 문양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마자 아네샤가 나에게 말했고, 이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다는 뜻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려진 문양이 새하얗게 환한 빛을 발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문양 안으로 들어가면서 만약 자신들의 세상으로 오고 싶다면 문양 안으로 들어갈 것을 청하며 장로와 그를 수행하던 이들의 앞에서 모습을 감추었고, 이후, 장로는 그 문양이 신의 세상으로 고양이들을 인도하는 신비의 통로 역할을 해 줄 것이라 믿으며, 신의 세상을 방문할 '사절단' 을 꾸리기 시작했다. 대표는 '하얀 사제들' 의 후손이라 칭해진 어린 하얀 암코양이였으며, 그를 비롯한 수많은 고양이들이 신의 세상을 '신비의 통로' 를 통해 신의 세상에 이르게 되었다.
  신과 그 일족 그리고 조상들의 터전으로 전승을 통해 알려진 '무지개 나라' 를 기대했던 고양이들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무척 실망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머무르던 숲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곧, 그들은 장로를 비롯한 여러 고양이들이 발견했던 빛의 존재들이 돌아다니는 모습을 통해 그 곳이 '신계' 임을 알 수 있었고, 그러면서 자신을 찾아와 '여왕' 에게 인도하려 하는 날개를 가진 '신족' 들을 따라 그들의 '여왕' 을 만나게 되었다.

  날개를 가지고 빛을 발하는 인간을 닮은 이들이라면 그들은 필경 요정들이었을 것이다. 고양이들은 자신보다 큰, 찬란한 빛을 발하는 날개를 가진 요정들을 '신' 혹은 '신족' 이라 칭했으며, 요정의 여왕을 '신의 여왕' 이라 칭하면서 경외하였으며 신을 동경하는 고양이들의 모습을 보며 요정의 여왕은 그들에게 하나의 약을 선물하였다. 이 비약은 '신' 의 정수로서 '신'-아마도 그들의 옛 신과 닮은 인간의 형상- 을 되찾아줄 수 있을 것이라 하며, 약을 사절단의 대표로서 온 하얀 고양이에게 건넨 요정의 여왕은 약병을 받은 사절단의 대표 그리고 남은 사절단원들에게 강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약병에 있는 약을 한 방울이라도 마셔서는 안 된다 -

  "약을 마시면 안 되는 이유가 있었나요?"
  약을 마셔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약을 마시면 몸에 심각한 이상이 생길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병에 들은 액체는 약이 아니라 잊혀진 종족의 정수-를 재현한 것-인 만큼, 마시는 것은 분명 고양이들 입장에서는 좋은 일은 아니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사실 약이라 할 수 없는 것이었어요, 잊혀진 종족이자 요정들의 조상이라 할 수 있는 인간의 정수를 요정들이 마력과 자신들의 기운으로 재현한 것으로 그들 특유의 의식을 행하는 것으로써 정수가 자연의 기운과 융합해 인간의 형상이 태어나도록 할 수 있었던 것이었지요. 하지만 요정들 자신도 그 의식을 행한 적이 없고, 그 정수가 확실히 인간의 특성을 재현할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도 하지 않고 있었지요."
  그런 불안정한 약을 함부로 줄 수 있느냐는 물음에 요정의 여왕은 물론 요정들 모두가 본래는 그 약을 주려 하지 않았다고 라니아가 말했다. 하지만 고양이들의 간절한 바람으로 인해 그 약을 요정의 여왕이 직접 건네기로 한 것. 그래서 요정의 여왕은 행여 그들이 정수를 먹는 안 좋은 일을 일으킬 가능성을 염려해 요정이 행하기로 하였던 의식을 사절단에게 세세히 가르치면서 그와 더불어 먹으면 안 된다는 경고를 내리려 한 것이었다.
  "...... 그럼에도 마셨겠지요?"
  "예, 그렇지 않았다면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겠지요?"

  의식에 대한 교육에 이어 약에 관한 경고까지 철저하게 받고나서야 고양이 사절단은 비로서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장로는 '신' 의 정수를 담은 액체를 보면서 무척 기뻐하였고, 사절단으로부터 전해 들은 '신족' 의 의식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장로는 드디어 '신' 의 재림이 머지 않았다고 여기었으며, 그러면서 '신족' 이 가르친 바대로 의식을 집행해 '신' 의 재림을 시도하려 하였다. 하지만 그 때는 이미 너무 늦은 밤이었고, 그래서 새벽 이른 시간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장로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정수를 담은 병을 자신이 관리하려 하였다.

  "여기서 장로가 깜빡 잠들었다가 병을 도둑 맞았고, 그로 인해 문제가 생겼겠지요? 그런데, 병을 훔쳐간 고양이는 대체 누구였나요?"
  "의외의 존재였어요. 장로는 늘 깨어있지 못하고 잠들었으며, 그 틈에 병을 도둑 맞았지요, 그런데 그 병을 훔쳐간 이는 다름 아닌......"

  병을 훔쳐 간 이는 다름 아닌 사절단의 대표로서 그 누구보다 신족에게 액체 정수에 관한 가장 많은 부탁을 받았을 그 어린 하얀 고양이였다. 어린 고양이는 처음에는 진심으로 장로에게서 교육을 받은대로 예의 바르게 행동하려 하였으나, 병을 건네 받고 그 영롱하기 이를데 없는 새하얀 빛을 보자마자 하얀 고양이는 돌변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절단의 대표로 왔던 그 하얀 고양이가 도둑이었던 것이네요. 게다가 마셔서는 안 된다던 것을 마셔버리기까지....... 분명 사제의 자손으로 그에 걸맞는 품성을 갖고 있는 아이일 것이라 장로는 믿고 있었을 텐데, 그렇게 장로의 기대를 져버리고 말았던 것이었네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말했다. 아닌 것이 아니라 사절단 중 하나 이상 정도는 '신' 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정수를 노렸을 것임을 짐작해 볼 수 있기는 했지만 그 사람이 누구보다 순수하다고 여기어졌을 사제의 후손, 그것도 사람으로 치면 어린 소녀에 해당되는 이였다는 것이 나를 놀라게 하고 있었다.
  "어쩌다가 물건에 대한 욕심이 생겨나 버린 것일까요."
  "신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그를 움직여 버린 것이라 할 수 있어요."   이후, 아네샤가 건네는 물음에 라니아가 바로 답했다.

  어린 고양이는 예로부터 신으로 추앙 받은 존재인 '하얀 고양이' 의 후손이라 칭해진 하얀 사제 일족의 후손으로 그것도 직계 후손이었다. 신의 적손이라는 의식은 신의 정수라 칭해진 영롱하게 빛나는 액체를 마주하는 그의 마음에 신이 될 수 있다는 욕망을 깨웠고, 그 욕망은 정수를 자신이 독차지하고 말겠다는 욕망으로 변해가고 말았던 것이었다. 그 욕망에 사로잡힌 채로 하얀 고양이는 신족의 여왕이 갖고 있던 정수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고, 그래서 의식을 마치고 장로가 정수를 받아든 이후로 새벽 이른 시간까지 깨어있겠다던 장로가 잠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하얀 고양이는 '신족의 여왕' 이 자신에게 건네었던 경고는 애초에 귀에 들어오지 않았으며, 여왕 앞에서 듣는 척만 했을 따름이었다.
  늘 깨어있겠다고 했지만 결국 장로는 잠들 것이라는 그의 예상은 잘 들어 맞았으며, 하얀 고양이는 장로가 잠든 틈을 노려 병을 훔쳐냈다. 그리고 신성한 나무 바로 앞에 있는 샘으로 병을 물고 가서는 병을 두 앞발로 들고서는 병에 담긴 액체의 반 가량을 자신이 마셔 버렸다, 정수의 힘으로 자신이 '신' 이 되고 싶다는 욕망을 그렇게 충족시키려 한 것. 그렇게 정신 없이 액체를 마시던 하얀 고양이는 이윽고 장로에게 그 사실이 발각되지 않도록 하려 하였고, 그래서 샘에 정수를 섞어 버렸고, 이후, '신' 의 정수가 섞이는 탓에 뿌옇게 흐려진 샘물을 담아서는 다시 장로의 집으로 돌아갔다.
  장로는 다행스럽게도 계속 잠들고 있었고, 그래서 뿌연 액체가 담긴 병을 장로 앞에 놓아두고 하얀 고양이는 재빠르게 도망쳤다. 이후, 하얀 고양이는 다급히 장로의 집을 떠난 후에 그대로 고양이 마을을 떠나며 모습을 감추었다. 이후, 마을 고양이들 중 누구도 그 하얀 고양이의 모습을 보지 못 했다.
  장로는 새벽 이른 시간에 깨어나서 병의 모습을 보고 병의 무사함을 확인했지만 이상하게 잠들기 전에 보았던 액체의 영롱한 빛이 크게 약해져 있었다. 이는 분명 약 아니 정수에 모종의 문제가 생겼음을 알리기에 충분해 보였으나, 의식을 진행하고 신의 재림을 맞이할 일을 그저 기대하고만 있을 뿐이었던 고양이 장로는 그저 오랜 시간 동안 방치해 두면서 정수의 기운이 약화되어 가고 있을 것이라 여기었을 따름이었고, 그래서 정수의 상태에 관한 문제 의식 없이 빨리 신의 재림을 위한 의식을 진행하려 하였다. 다급히 사람들을 불러서 신성한 나무 바로 앞의 광장에서 '신족' 이 가르친 바대로 의식을 진행하고 마지막으로 돌바닥에 병에 담긴 액체를 뿌려 '신' 의 재림을 지켜보려 하였으나......

  "물에 섞인 정수가 인간의 형상을 온전히 태어나게 할 수 있을 리는 없었겠지요."
  그 때 뒤에서 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에타의 목소리였다. 우연히 항구의 선착장에 들렀다가 거기서 라니아를 만나고 이야기를 계속 듣고 있었던 모양. 목소리가 들린 라니아의 뒤쪽을 바라보니, 과연 리에타의 라니아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이후, 리에타는 라니아의 오른편 뒤에 앉아서는 어렸을 때 들은 이야기라고 말한 이후에 라니아는 적어도 한 번씩 어린 고양이 족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를 하고는 했었다고 말하고서 마을에 있는 고양이 요정들의 선조들과 그들의 역사를 고양이 족 사람들이 알았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고 이전에 라니아가 말한 적이 있음을 밝혔다.
  이후, 리에타는 자신이 라니아로부터 들었다는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을 자신의 주변에 있는 이들에게 들려주려 하였다. 이야기를 하기 전에 자신이 라니아로부터 들은 것을 기억나는 대로 알려주려 하는 것임을 밝히고서 자신이 어렸을 적에 들은 것과는 몇 가지 다를 수 있음을 밝히기도 했다.   "사실, 의식이 있기 전에 신의 정수를 마시고 사라진 그 하얀 고양이가 마을의 샘에 정수를 풀면서 그로 인해 의식을 행하기 전에 마을의 모든 고양이들이 정수가 담긴 물을 마시게 되었지요. 물론 장로도 포함해서. 그렇게 하얀 고양이를 비롯한 마을의 모든 고양이들이 신의 정수를 품게 된 거예요."
  마을의 고양이들은 아침마다 샘물을 마시는 습관을 갖고 있었으며, 새벽, 아침 시간 대에 따로 그리고 삼삼오오 모여서 고양이들이 물을 마시러 샘을 향해 나아가고는 했다. 새벽 이른 시간에 장로가 의식을 행하여 새벽 이른 시간에 고양이들이 모이게 되었을 때에도 의식 직전에 고양이들이 샘으로 모여서 물을 마시고는 했었다. 어린 고양이가 정수를 마시면서 반 가량을 샘에 풀었으니, 그로 인해 마을 사람들 중 대다수가 어린 고양이가 풀어놓은 정수의 영향을 물을 마시면서 받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영향은 의식이 있은 이후, 다음 날에 드러나게 되지요."

  장로의 신 재림 의식이 실패하자 고양이들은 일제히 장로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장로는 물론 신을 목도했던 이들, 그리고 신계로 갔다왔다는 사절단에 속했던 이들 모두를 사기꾼으로 매도하는 이들까지 생겨났을 정도. 이에 장로는 자신과 신족 그리고 신계를 영접한 이들은 모두 결백하며, 정수를 훔쳐간 이가 있을 것이라 주장하였으며, 정수를 훔쳐간 이를 찾아내 엄중한 심판을 받게 할 것임을 선언하였다. 하지만 범인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고-애초에 장로부터 하얀 고양이를 비롯한 신계를 영접한 이들 중에는 범인이 없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영부영 고양이들의 마을에서 하루가 지나갔다.
  그러나, 그 하루가 지나고, 마을과 마을에 있던 이들의 운명이 송두리째 바뀌고 말았으니, 그들 모두가 이전보다 훨씬 큰 체격을 가진 이들로 변한 것이었다. 체격이 커졌음은 물론, 몸을 덮었던 털도 사라지고 앞 다리, 뒷 다리를 비롯한 체격에도 변화가 생겼던 것이었다. 놀란 이들은 앞다투어 샘을 바라보기 시작했으며, 이들 모두가 신과 닮은 형태로 변했음을 알게 되었다. 다만, 정수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은 그들의 육신은 신처럼 변했어도 마음은 이전과 변함이 없었을 따름이었다. 그러한 그들의 정체성은 여전히 인간의 특성과 문화를 받아들인 고양이 족이었음은 그들에게 남겨진 털인 머리카락 위의 고양이 귀를 통해 드러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들의 외견은 더 이상 고양이가 아니었음은 분명했고, 결국 그들은 정 들었던 고향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주해 나아가야 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고, 샘 인근의 마을에서 샘을 마신 이들이 신이 되어 신계로 떠나갔다는 소문이 여타 지역의 고양이들 사이에 퍼져 나아가기 시작했고, 그리하여 고양이들이 그 샘의 물을 마시고 신족이 되기 위해 앞다투어 샘으로 나아갔지요."
  "그리고 그 물을 마신 이들은 '신족' 과 닮은 모습으로 변하며 고향을 떠나 이전에 떠나간 이들처럼 다른 곳으로 이주해 나아갔겠지요?"
  "그렇지요, 그렇게 고양이 족은 요정들처럼 인간과 닮은 모습으로 변한 채로 자신들의 고향을 떠났고, 그것이 숲 속 고양이들 역사의 마지막 날이 되었지요. 하지만 그들이 '신족' 이라 칭해진 요정의 외모를 닮아갔다고는 하지만 그들의 마음까지 '신족' 의 그것을 가져가지는 못 했지요. 그것이 신이 되고픈 욕망에 사로잡힌 하얀 고양이가 정수를 샘에 뿌린 결과예요."
  이야기의 마지막은 라니아가 이어가려 하였고, 이어서 아네샤의 물음에 답을 하는 형식으로 라니아가 하나의 이야기를 끝냈다. 그렇게 라니아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나는 한 가지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의 시작이라 할 수 있었던 하얀 고양이는 어떻게 되었느냐는 것이었다. 이 물음에 라니아는 이렇게 답했다 :
  "그 하얀 고양이의 행방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어요. 밝혀질 수도 없었을 것이고, 밝혀진다고 한들, 그것에 큰 의미가 있거나 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결국 정수의 반을 마셔버린 하얀 고양이도, 샘물의 정수를 마신 고양이들도 모두 인간의 형상을 갖게 되었으니까요. 다만, 요정이 만든 인간의 정수를 취하는 것만으로도 고양이들은 인간의 형태를 취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겠지요. 그래서 그 하얀 고양이는..... 결과적으로 종족의 운명을 가장 먼저 바꾼 선구자적 존재가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요정의 기운을 얻고 인간의 형상을 취하게 된 고양이 족 사람들은 그들의 '신들' 그리고 '신족' 이 오래 전에 사라져 잊혀졌던 '인간' 과 동족이었음을 비로소 깨달았으며, 그와 더불어 자신들이 '신' 이라 칭해졌던 이는 숲에서 유일하게 남은 인간으로서 외로움을 이겨내며 자신들을 보살피고 지켜왔음을 깨닫고, 그와 더불어 그를 믿고 따라주었던 선조들에 대한 존경과 동경을 가진 이들도 생겨났다고 한다. 뒤늦게나마 고양이 족은 그 동경심에 의해 자신들이 잊고 버렸던 신을 다시 찾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고양이 족 사람들 중에서 당시 숲에 살았던 이들은 선조들을 보살폈던 숲의 유일한 인간을 신으로 모시는 신앙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전해진다.

  "그 고양이 숲의 고양이들을 선조로 삼는 고양이 족을 고양이 요정들이라 칭하며, 그 당시의 고양이들이 이 마을 그리고 인근에 사는 고양이 요정들의 조상이에요."
  라니아는 조용히 미소를 띠면서 두 번째 이야기를 마쳤고, 고양이 요정들의 유래에 관한 설화는 두 가지가 존재하며, 자신이 했던 이야기는 그 중 하나였음을 밝혔다. 다른 하나는 옛 세니티아에서 수인들이 난을 일으킨 이후, 수인들의 민심이 분열하기 시작했을 때, 도주했던 고양이 족의 일부가 요정화했다는 이야기였다는 모양. 그렇게 이야기를 마치고 나서 라니아는 이제 자신은 선착장 일대를 조금 둘러보았다가 집으로 가겠음을 밝히고서 나를 비롯한 두 사람에게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그 곳으로 가라고 말한 이후에 자리에서 일어나고서 서쪽-바다를 바라보는 방향에서 오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일행에게서 멀어지려 하였다.



  "거기, 두 사람, 혹시 내 대장간을 잠깐 들르는 것은 어떤가옹? 마침 일을 해야 하니, 어떻게 일을 하는지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다옹."
  이후, 줄곧 라니아의 곁에 앉아있던 리에타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자신의 일터를 구경하러 가겠느냐고 묻고 있었다, 그리고서 마침 일을 새로 시작해야 하는 만큼, 어떻게 자신이 일을 하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리고서 내가 아네샤와 함께 나란히 서쪽의 대장간 쪽으로 나아가려 하자 리에타가 그런 나와 아네샤의 모습을 향해 잠시 고개를 돌리고서 앞장서 나아가는 듯이 대장간 쪽으로 뛰어가는 듯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는 새, 리에타가 길에서 키아라 그리고 회색과 하얀색을 띠는 고양이 귀와 꼬리가 달린, 그리고 회색을 띠는 긴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키아라와 다소 비슷한 체격의 소녀와 길을 마주했다. 키아라의 우측 곁에 있는 소녀의 옷차림은 어깨 끈이 달린 원피스로 치맛단이 허벅지 정도까지 내려가는 하얀 옷에 하얀 샌들을 신고 있었다. 옷의 색이 약간 투명해서 옷이 감싸고 있었을 허리, 허벅지의 윤곽이 약간 드러나고 있었다. 키아라는 이전과는 옷차림이 달라졌으니, 상의는 수병의 제복과 다소 비슷하지만 하단이 짧아 상단 부분이 허리까지 올라가는 치마와 더불어 배 부분을 약간 노출시키고 있었다. 다만, 치마의 단 부분은 무릎 정도까지 내려가고 있어서 그렇게 야한 옷차림은 아니었다.
  "아, 키아라, 루아(Lua)! 어디 가는 거냐옹?"
  처음 마주한 그 고양이 족 소녀의 이름은 루아로 키아라, 리에타와 무척 친한 이였던 것 같았다. 그 때, 키아라가 리에타를 보더니, 근교로 가고 있음을 밝혔다. 그리고서 그 날에는 종일 도시 바깥의 근교에서 머무르고 있다가 집에 돌아오려고 한다고 자신들이 할 일을 밝혔다.
  "맞아, 루아는 오늘은 경계에 있지 않는 거지? 키아라는 지난 번 일로 쉬는 것이고."
  이에 루아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리고서 조용히 목소리를 내어 리에타에게 언젠가 같이 놀러 갔으면 좋겠다고 말하자, 리에타가 그런 루아 그리고 루아의 곁에 있던 키아라의 모습을 보면서 활짝 웃으며 그 물음에 답으로써 말했다.
  "일거리라는 것이 없을 것 같더라도, 늘 있게 마련이라서 말이야옹."
  그러면서도 언젠가 기회가 되면 같이 놀러가자고 청했고, 이에 키아라가 알겠다고 화답을 했다. 이후, 키아라는 루아라 칭해진 소녀와 함께 내가 있는 방향 쪽으로 걸어 나아갔다. 그러면서 나와 아네샤를 지나쳤고, 그 때, 키아라가 나에게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자아, 어서 따라오라옹~ 많은 것을 보여주겠다옹~"
  이후, 리에타는 나에게 어서 따라올 것을 청하며 대장간 쪽으로 나아갔고, 이후에 자신이 닫아 놓았던 대장간의 문을 다시 열어서는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서 그는 대장간 안에서 내부의 아궁이를 비롯한 시설들을 정비하면서 "잠시만 기다려라옹~" 이라고 말하면서 기다려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간 마을에 있는 무구들은 리에타가 만든 것이려나."
  "그러하겠지." 대장간 안에서 부지런히 일에 열중하고 있는 리에타를 보면서 아네샤가 건네는 물음에 내가 답했다. 마을에 있는 대장간으로 리에타가 일하는 곳이 유일하지는 않겠지만 클라리스, 미라의 무구를 비롯해 귀중한 무구들을 제작한 이가 리에타이지 않을까 싶었고, 그래서 다소 어린 듯한 인상과 '~야옹' 으로 끝나는 앳된 말투에도 불구하고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그 무렵, 가게 문이 열리면서 열린 문틈으로 리에타가 몸을 내밀면서 "들어오라옹~." 이라 외쳤다. 이에 나는 알겠다고 화답하고서 앞장서서 리에타의 대장간 그 내부로 들어서려 하였고, 그리하여 나와 아네샤가 나란히 리에타의 가게 안으로 들어서려 하였다.



  리에타의 가게이자 거주 공간이기도 한 대장간. 그 벽면의 한 곳에 아궁이가 붙어 있었으며, 아궁이 앞에 모루 그리고 리에타가 늘 쓰는 망치, 집게들을 비롯한 도구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집게, 칼은 물론이고, 망치도 한 개가 아닌 여러 개가 모루 앞 탁자에 비치되어 있었다. 아궁이 바로 옆에는 대장간에서 쓰기 위해 마련된 도구들이 비치된 선반들이 위 아래로 나란히 자리잡고 있었으며, 선반 아래에는 도구 상자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그 옆에는 여러 바구니들이 놓여 있었는데, 도구 상자는 기계 제조를 위한 물품들을, 그리고 바구니에는 제품 제조에 쓰이는 원료 자재들이 들어있다고 리에타가 말했다.
  "한 번 들여다 보라옹~ 언니들은 안 할 것 같지만, 그래도 모르니까옹~ 훔쳐 가면 안 된다옹~"
  "알겠다옹~" 리에타의 당부에 아네샤가 "아옹~" 으로 말을 끝내며 답했고, 그 이후로 아네샤는 리에타와 대화를 할 때에는 '~아옹', '~야옹' 으로 말을 끝내며 답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아네샤가 자재들을 꺼내러 바구니들을 들추는 리에타에게 물었다.
  "리에타냥 말고 아옹, 야옹으로 말을 끝내는 이들이 있냐옹?"
  "몇 있다옹~" 그러자 리에타가 바로 답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 중에 의외로 많은 이들이 그렇게 말을 하는 경우가 있음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면서 리에타는 바구니들 중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것에서 투명한 돌 조각 몇 개를 꺼내서는 탁자 위에 올려놓은 삽 위에 그 결정들을 올려 놓았다. 그 후, 리에타는 아궁이로 다가가 그 하단 부분 앞에 앉아서는 두 손을 앞으로 펼쳤다. 그리고 그 두 손 앞에서 새파란 불꽃이 일어나더니, 그 불꽃이 아궁이를 가열시키기 시작했다. 불은 순식간에 크게 일어났고, 그로 인해 검은색을 띠고 있던 아궁이가 하얗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놀랐냐옹? 나도 이 정도는 할 수 있다옹~."
  리에타는 아무리 그래도 마법과는 관련이 없는 일을 하고 있다 보니, 마법으로 불을 만들어낼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런 리에타가 푸른 불꽃을 (아무리 봐도) 마력 (으로 보이는 것) 을 이용해 불을 만들어내는 광경을 보면서 의외라는 생각을 하고 있기도 했다.
  "리에타 아주머니께서 나에게 마법도 가르쳐 주었다옹~ 이 정도 즈음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옹~"
  그렇게 아궁이를 하얗게 달아오르게 하고 난 이후, 그 자리에서 일어나며, 리에타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후, 리에타는 작업대로 쓰는 책상 위에 바닥에 놓여 있던 거푸집들 중 하나를 올려놓고서는 결정 조각들이 놓인 돌로 만들어진 삽을 두 손으로 들어서는 아궁이의 상단에 자리잡은 아궁이의 입 안에 결정들을 넣어 놓았다. 그렇게 결정 덩어리들을 불구덩이가 된 아궁이 안에 넣어 놓고서, 리에타가 나에게 말했다.
  "전에 만들어 둔 거푸집이다옹~ 클라리스가 전에 만들어 달라 부탁을 해서 이렇게 만들었다옹~"
  "클라리스 씨가 전에 부탁한 것이 있었던 거예요?" 이후, 내가 건네는 물음에 리에타는 그렇다고 답하고서 아궁이를 휩싸고 있던 푸른 불꽃 앞에 앉아서 바람을 일으켜, 그 불꽃을 계속 거세게 일으키려 하면서 그가 그 남쪽의 섬으로 떠나기 전에 자신에게 부탁한 것이었음을 밝혔다.
  "그 무렵에 이미 자신의 검이 부러질 수 있음을 생각한 것이겠네요."
  "그런 것 같다옹~" 이후, 리에타는 조용히 목소리를 내며 답했다. 이후로는 집중이 필요한 순간인 만큼, 그의 곁에서 조용히 리에타가 어떻게 작업을 하는지를 지켜보기로 했다. 그 무렵, 정문 부근의 창가에 누군가 다가와서는 리에타를 불렀다.
  "리에타, 아침 일찍부터 일을 시작하고 있구나, 잘 되고 있어?"
  그 무렵, 전에는 보지 못했던 어떤 요정 소녀가 창가에서 리에타에게 말을 걸고 있었던 것이었다. 연두색 긴 머리카락 그리고 진한 녹색을 띠는 눈동자를 가진 소녀로 블라우스 형태의 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본래 소매는 길었던 것 같지만, 그 소매가 걷혀 반 소매처럼 보였다. 소녀의 머리에는 하얀 머리 장식이 달려 있었으며, 그 위의 한 부분-머리의 왼쪽에 가까운 부분이었다-에 꽃 모양의 장식이 달려 있었다. 소녀는 리에타의 대장간에 오자마자 창가로 오더니, 일이 잘 되고 있느냐고 묻고 있었던 것.
  "잘 된다옹~" 이에 리에타가 밝게 목소리를 내면서 답했다. 답을 하면서 리에타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잠시 아궁이 쪽으로 시선을 향해 보니, 아궁이는 계속 파랗게 일어나는 불꽃에 휩싸인 채, 하얗게 달아오른 모습을 계속 보이고 있었다. 그 안에 들어가 녹아내린 결정은 무기로 쓸 수 있기는 하지만 어지간한 금속보다 더욱 큰 열이 필요한 만큼, 강한 불이 필요해서 제련을 위해서는 대개 마법으로 불을 일으킨다. 강한 불길을 지속적으로 일으키면서 결정을 녹인 이후에 결정이 녹은 물에 각종 특성을 가지는 시약을 섞거나 마법으로 특성을 부여하고서, 그 혼합물을 거푸집에 들이부어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마을에는 무기를 제조하는 대장간이 하나 있고, 그 대장간을 틈만 나면 구경하고는 했었다. 어린 시절부터 대장간을 들렀고, 친구들을 불러서 같이 그 모습을 보고는 했다. 엘젠 산맥 곳곳에서 발견되는 결정이 열에 의해 녹아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 도중에 대장장이가 번개들을 모아 그것으로 강한 불길을 일으켜 결정을 녹이는 광경, 녹아내린 결정 안에 번개 기운이 스며드는 광경 등을 볼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어떻게 검이 만들어지는지를 대략이나마 알 수는 있었다.
  "예전에 유명했던 검이 있었잖아, 알고 있어?"
  그 광경을 지켜보는 동안 내 옆에 있던 카리나가 물었다. 이에 내가 "실페디아(Sylfedia) 를 말하는 것 아냐?" 라고 되묻고서 그 물건은 이제 흔하지 않느냐고 이어 카리나에게 묻는 듯이 말하기도 했다. 원본은 이미 4 세기에 나온 물건이고 몇 세기를 지나면서 수많은 변형이 생성된 물건이었다.
  "본래 실페디아도 어떤 무기의 변형이었잖아, 기계를 대상으로 전자 파동을 일으킬 수 있는 검이라 했던가."
  "그것은 나중에 나온 후기형들 중 하나야." 이후, 카리나가 건네는 물음에 내가 바로 답했다. 그리고서 전자 파동을 일으킬 수 있는 최초의 무기로 나름 주목을 받기는 했었다고 말하고서 언제 어떻게 몰려올지 알 수 없는 기계 생명체들을 제압하는 데에 특화된 성능을 가진 무기였다는 점에 의의가 있는 제품이었다고 이어 그에게 알려주기도 했다. 이렇게 설명해 주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으니, 카리나는 그러한 정보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음이 그 이유였다.
- 카리나가 언급한 '전자기 파동 분출형' 은 '실페디아 제페(Sylpheida Zepe)' 로 '엘즈니아 제 25 형 (Elznia 25zeßï)' 의 통칭으로 원래의 실페디아는 엘즈니아 제 16 형 (Elznia 16zeßï) 의 변형이라는 설이 나온 바 있었다. 이러하듯, 실페디아 군은 본래 엘즈니아라는 도검 류를 원형으로 삼는 무기 군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엘즈니아에서 분리되어 독자적인 규격이 된 것이었다. 실페디아 제페는 이례적으로 엘즈니아를 원형으로 다시 나온 물건이지만 실페디아 군의 특성도 갖고 있는 것이었다.

(*) 남은 하나는 크란리드(Kranrid) 로 이전에 있었던 사건으로 행성계가 멸망하면서 크란리드라는 이름 자체가 몰수되어 현재는 '제 4 의 행성 (Nyezeplanet)' 으로 칭해진다. 4 번째로 세니티아의 정령들에 의해 발견된 행성이었기 때문이었다. 세니티아 성계권에서 행성들의 이름을 발견된 순서로 말해 보자면 이러하다 : 에르세치아 - 가마로드 - 제 4 행성 (크란리드) - 베라티사 - 아르데이스 - 조하르

Return
<- 2-5. Go to the Back 2-7. ->